Adios Argentina! 아디오스! 나의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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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 이어...>
계속된 노답 행진에 정신적 방황이 이어졌다. 다시 성당에서 만난 밀싹 주스 영감님 댁에 찾아갔다. 마침 한국에서 넘어왔다는 조카분이 집에 있어서 인사를 나눴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한국을 떠나 아르헨티나로 정착 왔다길래 안 그래도 만나보고 싶었다. 조카는 나보다 2~3살 연상의 남자로 한국에서 SK를 다니다 그만두고 삼촌이 자리를 잡고 있는 이곳으로 넘어왔다고 한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나와 행보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일하는 가게도 아베샤네다 근처에 있는데 같이 가볼래요?
그래 이제는 내게 선택할 수 있는 옵션도 없다! 일단 부딪쳐 보는 거지...
버스를 타고 그분이 일하는 아베샤네다로 향했다. 찾아간 곳은 주변이 허름한 인적 없는 길목에 위치한 봉투 공장이었다. 말 그대로 비닐봉지를 만드는 봉투 공장. 비닐봉지라 하면 왠지 최신식 설비들이 빠르게 돌아가고 한쪽에서 봉투가 자동으로 쭉쭉 쌓이는 그런 자동화 공장을 생각했는데 여기는 1960~70년대에 쓸 법한 방적기 비슷한 기계만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검은색 비닐 원단을 기기 끝에 걸어서 기기를 작동시켜서 기계 한쪽에서 사람이 앉아서 일일이 재단과 포장을 해줘야 하는 기계로 보였다. 말이 공장이지 가내 수공업보다 조금 더 나아 보이는 그런 수준?
듣자 하니 이 공장도 예전에 그 영감님이 소유하던 공장인데 조카분이 한국에서 넘어오면서 싼 값에 인수를 했다고 한다. 어차피 그동안 계속해서 운영되던 공장이고 일하는 사람들, 기존 거래처도 있으니 주인만 삼촌에서 그 조카로 바뀌고 모든 게 동일한 상황.
여기까지 오니 이곳에서의 생존 방법이 대략 나오는 것 같았다.
상황을 종합했을 때 가장 좋은 케이스는 아르헨티나 현지에 자리 잡고 있는 가족, 친지, 친구, 지인과 함께 일을 하는 것.
최상은 아니지만 여전히 좋은 케이스로는 이분처럼 친척, 지인이 운영하는 사업체를 인수해서 자기가 운영하면서 기반을 다져나가는 법.
평범한 케이스로 현지에 지인, 친척 등을 통해 일자리를 소개받아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것.
마지막 최악의 케이스로 지인, 친척, 가족, 친구 등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돈 써가며 버티다 말도 안 통하니 비비고 비벼 겨우 일자리를 하나 구해 어떻게든 생명을 연명해 나가는 것 정도로 정리가 가능했다.
슬픈 사실은 이런 케이스 중 나는 맨 마지막 케이스, 비비고 비벼 겨우 일자리를 하나 구해 어떻게든 생명을 연명해 나가는 것에 해당된다는 사실이다. 대략 현지 임금을 계산했을 때 한 달 일하고 받을 수 있는 돈은 미화 $400불 정도...
아름다운 결론이었다. 입에서 노래 한 소절이 절로 튀어나온다.
나는 떠날 때부터
다시 돌아올 걸 알았지
눈에 익은 이 자리 편히 쉴 수 있는 곳
많은 것을 찾아서 멀리만 떠났지
난 어디서 있었는지
하늘 높이 날아서 별을 안고 싶어
소중한 건 모두 잊고 산 건 아니었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그대 그늘에서 지친 마음 아물게 해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먼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너를 보낼 때부터
다시 돌아올 걸 알았지
손에 익은 물건들 편히 잘 수 있는 곳
숨고 싶어 헤매던 세월을 딛고서
넌 무얼 느껴왔는지
하늘 높이 날아서 별을 안고 싶어
소중한 건 모두 잊고 산건 아니었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그대 그늘에서 지친 마음 아물게 해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먼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그대 그늘에서 지친 마음 아물게 해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먼 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이곳에서 제대로 된(?) 삶을 살기는 힘들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지금의 나에게 어떠한 패가 남아 있을까? 한국에서 혹시나 설마 절대 그럴 일 없겠지만 만약 이런 일이 발생하면 실행할 몇 가지 '플랜 B'를 준비해 뒀었다.
대변인 아르헨티나 이민 플랜 B 리스트
1.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간다.
2. 뉴질랜드로 워킹 홀리데이를 간다.
3. 미국 뉴욕에 있는 친구의 사업체에서 일하면서 미국 이민을 시도한다.
실제로 한국을 떠나기 전 가장 유력한 대안은 호주 워킹홀리데이였다. 최장 2년까지 비자를 연장할 수 있는데다 어학연수 중 너무나 감명받았던 영국과 가장 유사한 사람들, 시스템까지 갖춰져 있었다. 다만 내 나이가 워킹 홀리데이를 갈 수 있는 마지노선에 걸쳐 있는지라 호주나 뉴질랜드 행 선택지를 고르려면 빨리 한국에 돌아가서 재정비 해 3개월 이내 다시 한국을 떠나야 했기에 시간적으로 호주, 뉴질랜드 워홀이 마음에 걸렸다.
는 핑계고 사실 이때쯤 되자 지겨워졌다. 호스텔에서 밤새도록 떠들던 호주 여자 투숙객 때문에 호주행이 더 망설여진 것도 있지만 정처 없이 계속되는 떠돌이 생활을 또다시 진행해야 한다는데 진저리가 났다.
답답한 마음에 미국에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더니 친구가 결론을 내려 주었다.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시작하려면 엄청 힘들어, 뉴욕으로와!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생활하면 돼!
안 그래도 이곳에서 괜히 시간과 돈만 허비하는 것 같아 마음이 영 불편했는데 오래간만에 듣는 속 시원한 대답이었다.
그래... 가자 미국으로!
이미 마음은 뉴욕에 가 있었지만 갈 땐 가더라도 아르헨티나에서 가볼 곳이 남아 있었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가 있는 파타고니아 칼라파테 지역이 바로 그곳이었다.
조선일보 재직 시절 자재팀에 걸려있던 달력의 칼라파테 빙하 사진들을 잊을 수 없었다. 아르헨티나에 가면 저기는 꼭 가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나는
페리토 모레노 빙하를 보기 위해 칼라파테에 왔다.
겹겹이 쌓여있는 빙하들을 보니 그동안 어지럽던 머리가 정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 나는 이 빙하를 보러 왔던 거구나...
그래! 어쩌면 나는 단순히 여기를 밟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부터 가지고 온 칼라파테에서의 숙제를 끝내니 아르헨티나에서 미련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서울로 돌아가서 다시 몸과 마음을 정비하고 뉴욕으로 떠날 일만 남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나의 아르헨티나 생활이 슬슬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브런치에서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닭쳐라 남미!'도 이제 슬슬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쯤 되면 비판적인 시각으로 내 글을 꼼꼼히 읽어온 독자들이라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뭐야?! 이 인간 이민 간다더니 결국 관광만 하고 왔네???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여기에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다.
아니요! (어쩌다 보니) 일도 하고 왔수다!
칼라파테에 도착해서 처음 하루를 한국 교민이 운영하는 '린다 비스타'라는 콘도형 숙소에서 보내게 되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지냈던 한인 민박 '남미OO'하고는 달리 이곳은 전 세계 여행객이 모이는 고급 콘도형 숙박시설이었다. 위생, 식사, 서비스 등 모든 면에서 외국인들이 참고하는 주요 여행 사이트 트립어드바이저(Tripadvisor.com)에서 칼라파테 1~2등을 다투는 믿을 수 있는 숙소였다.
고급 숙박시설인 만큼 비용적으로 부담이 가서 하루만 지내고 나머지 일정은 린다 비스타 사장님이 소개해 주신 저렴한 숙소에서 잠을 자고 칼라파테 투어 예약과 픽업을 위해 매일 린다 비스타에 들르는 일정이 이어졌다.
조식도 얻어먹고 커피도 얻어 마시며 한국인 사장님 내외분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일들, 그리고 고국의 소식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칼라파테 여행에 대한 조언과 부에노스 아이레스행 교통편까지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다가온 칼라파테 일정의 마지막 날. 미련 없이 칼라파테 관광도 모두 끝내고 돌아가는 버스표도 이미 예매해 두었다. 버스를 28시간(2시간 8분 아니다! 28시간이다!) 타고 바릴로체 라는 관광지에 들러서 다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향하는 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릴로체행 버스를 기다리며 린다 비스타에서 사장님 내외분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린다 비스타 바깥양반이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나에게 물었다.
우리 친구, 나 일할게 있는데 좀 도와줄래요?
그렇게 사장님의 트럭을 타고 향한 곳은 숙소에서 얼마 떨어진 공터였다. 이곳에서 숙박업으로 나름 자리를 잡은 분들이라 부동산도 제법 있으신 듯했다.
여기 땅을 좀 골라야 하는데 같이 삽질 좀 하자고!
그래! 어차피 몇 시간 후면 칼라파테를 떠나는데 이 정도도 못하랴?
삽질을 했다. 열심히.
이 얼마 만에 해보는 노동인가? 땅 파고 흙 고르고 쓰레기 버리는 작업으로 느끼는 노동의 숭고함!
그렇게 아르헨티나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노동을 마치고 삼겹살을 얻어먹은 후 나는 칼라파테를 떠났다.
그리고 약 일주일 후...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2개월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한국을 떠나 있었는데 내가 없어도 대한민국은 너무나 잘 돌아가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시간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서울에서의 나는 그저
대변인(33세), 무직
에 불과했다. 어차피 뉴욕으로 떠나기로 한 일정. 나도 이곳에 미련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미국을 가기 위해 잠시 시간을 보내는 환승역에 불과할 뿐.
그리고 약 4개월 후
대변인은 미국 뉴욕에 왔다.
그리고
뽀로로 인형을 쓰고 뉴욕 타임 스퀘어를 밟은 세계 최초의 인류라는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대변인은 그렇게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고 약 3개월 후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끝>
<글을 맺으며...>
아르헨티나에서의 기억들을 정리해야겠다 생각한 지 약 3년의 시간이 흘러 이제야 그 작업을 마칠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을 통해서 무언가 큰 성과를 이룬다거나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보다는 내 스스로 이런 일들이 있었다 이야기하고 싶었다. 글의 서두에서도 적었지만 작금의 경제위기, 불황 속에서 청년들에게 해외 진출, 창의, 도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인, 교수, 작가, 기업가 등 이른바 대접받는 사람들이 사회적 절벽에 놓여있는 청년들을 절벽으로 등 떠 미는 현실을 보며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떠났기에 누구를 원망한다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말이다. 아르헨티나와 미국을 거쳐 한국에 돌아온 후 또다시 긴 방황의 세월을 거쳐 일상적인 삶의 궤도로 돌아오기까지 그 후로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덕분에 삶의 방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고 스스로를 더 잘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이런 나의 모습들을 타산지석으로 삼는다면 내가 아르헨티나로 떠나기 전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지금의 그대에게도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각종 매체를 통해서 젊은이들에게 해외로 진출(이라 쓰고 자폭이라 읽는다)하라고 말로만 떠드는 사람들에게도 당당히 말하고 싶다.
난 해봤어! 해봤다고! (영화 '실미도' 임원희 님 대사 중에서)
※본 이야기는 100% 사실에 기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