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여전히 페미니즘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말하기엔 내게 깡이 없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여 내 삶의 근간을 흔드는 것도 두렵다. 내가 살아온 방식과 말해온 언어를 바꿔야 하는 것을 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나는 페미니스트야'라는 말을 하려 할 때마다 머리와 언어의 거리를 통감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말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이젠 말해보려 한다.
섣부르게 말하는 것을 넘어 글로서 이야기해보려 하는 것은 그래서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니까
첫번째 이야기 : 운이 좋았던 시작
여성혐오의 '여' 자도 모르는 상태로 강남역 살인사건을 여성혐오 사건으로 정의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토로하고 다니던 나였다. 하지만 정말 다행히도 나는 이 입시민국에서 학업이라는 것 자체를 머릿속에서 완전히 삭제한 18살이었고 공부가 하기 싫어 어떻게든 다른 일들을 찾으려 했다. 마을 공유지 파지사유에서 진행된 페미니즘 캠프 '아웃사이다'에 참여하게 된 것도 그 몸부림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 우연이 내 고등학교 인생의 전환점이 된 건 당시의 나조차 알 수 없었던 것이었다.
메갈이라면 치를 떠는 남성들이 주장한다. '착한 언어의 페미니즘'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난 그 '착한 언어의 페미니즘'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페미니즘 세미나 아웃사이다는 발제자들이 가져온 다양한 사례를 중심으로 여성혐오를 이해하고 그와 관련된 스스로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공간이었다.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눴고 나 또한 그 공간에서 대화하려 노력했다. 물론 거부감도 있었다. 친구들과 히죽거리던 주제부터 일상 그 자체가 되어버린 단어까지 내 삶이 곧 여성혐오였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퀴어에 대한 이야기도 낯설었다. "너 게이냐??"라는 물음이 하나의 유희였기에 그 유희를 포기하는 것도, 또 그것이 누군가를 상처 준다는 것을 깨닫고 싶지 않았다.
여성혐오를 배우는 것은 새로웠다. 몰랐던 것을 안다는 희열과 함께 '선각자'로서 페미니즘을 내세울 수 있다는 것 또한 말하는 걸 좋아하는 내게 꽤 매력적이었다.
누군가에게 십 수년간 폭력을 휘두르던 사람이 있었다. 설렁 그 사람이 법을 공부한다 한들, 그의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페미니즘이라는 법 속에 숨어 스스로의 폭력을 숨기려 했다.
가해자였던 날, 인정할 수 없었다.
마음이 아닌 머리로서 이해한 페미니즘을 전부라고 믿었다. 물론 그것이 흔들리기 전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계속)
'페미니즘'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부적절한 부분이 있거나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