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후 깨닫는다는 건 슬픈 일이다.
1.
첫사랑이 너인 걸
20년 후 깨닫는다는 건 슬픈 일이다.
고백하기에 이미 지나쳤고,
추억하기엔 아직 못미쳤다.
이렇게 스스로 알아채지 못해 미결인 사랑은 날마다 짙멀어져 가는데,
다행인건 오늘이 너와
그래도 가장 가깝다.
그래서 매일,
가장 멀리, 또 가까이를 서성이며
사소하게 후회를 한다.
2.
내 이름의 여인숙을 우두커니 발견한 날
페미니즘 영화 강의를 들어가려다 말고
사진을 찍게 되었다.
저 안의 이름모를
나그네, 혹은 연인의
구원을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실상은
나의 사랑과 구원을
기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빌딩 주차장 아저씨가
뭐 좋은 게 있냐고
물어보실 때
저 여인숙 이름이
제 이름이예요.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저들 나그네처럼 낯선 골목에 서있다는 걸.
3.
네가 꿈에 나타난 오늘,
그저 바라보기만 하던,
네가 종일 그리울 줄 몰랐다.
왜 이제서야
처음으로 그립다고 느낀
오롯한 하루를
보낸 것이냐.
지난 눈빛을 알아차렸단 말이냐.
그래서 알게 되었다.
내 눈에서 내 마음까지
내 귀에서 내 마음까지
내 안에
달팽이처럼 고단하고 지루하게 느린 길이 있다는 걸.
4.
마치
달팽이가 지나온 터널처럼,
이 길은 뚫리고 말았다.
네가 나를 바라본 그 눈빛, 내가 오래걸려 알아챈 그 눈
빛.
이제
섬광처럼 단숨에 다닐 길이 되었다.
다시 먼, 또 가까운 훗날
다른, 또 같은 너와 마주친다면
20년 보다 훨씬
빨리 닿을 수 있겠다.
5.
내 남루한 시절이
연습이라 하기에는 죄송하므로
네게 공유되었거나, 생략되었기를.
아니면 숙련되었거나.
나, 네게로 갈까,
너, 내게로 올까.
몽롱함과 영롱함의 차이,
혼미인지 감격인지.
그 차이를 밝히는 선명한 조망이 있는 길.
다만
넌 나의 눈빛을 단숨에 알아주기를.
이 낯익은 새 길이
네게서 창조되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