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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Apr 11. 2024

봄 길

거리를 거닐다

길고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다. 

 

이른 점심을 먹고 산책길에 올랐다. 

오후 업무 시작까지는 아직 40분이나 남았으니까.


40분이라는 시간이 주는 여유가 좋다. 

자그마한 초코맛 막대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 회사 현관을 나선다. 원래 이 사탕에 우유맛이 났던가? 오랜만에 먹어보는 막대 사탕의 부드러운 달콤함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바깥으로 나서니 봄 내음이 코로 빨려 들어온다. 얼굴을 스치는 앞머리가 봄바람에 기분 좋게 살랑인다. 경쾌한 발걸음 때문인 건지, 오전 내내 불편했던 새로 산 구두도 그렇게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건물을 나와 소방서 모퉁이를 돌아 작게 나있는 길에 들어섰다. 봄보다 먼저 핀 자그마하지만 선명한 개나리 덤불이 나를 반긴다. 작게 나있는 왕복 4차선 도로 건너편으로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사람 키의 세배 정도 되는 거대한 철제 팬스가 쳐져있다. 그곳과 참으로 대비되는 이쪽의 개나리길이다. 차도 별로 다니지 않고, 사람도 거의 없는 길. 개나리가 가득 피어있다. 이 따사로움은 어디까지 이어진 걸까? 


고개를 들어 앞을 본다. 저 멀리까지 이어진 개나리의 향연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낸다. 이쪽 그리고 저쪽 구도를 바꿔가며 셔터를 누르는 내 손이 바쁘다. 길에서 이러고 있는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난다. 


길가에 핀 개나리를 한번 바라보고, 카메라 안의 개나리를 바라보길 두어 번.

이윽고 생각이 형태를 갖춘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간직할 수 없는 거구나. 하고.


기억하고 싶은, 지켜내고 싶은 순간을 만나면 

어떻게든 잡으려 했다. 버릇처럼 그랬다.


어쩌면 나에게는 생에 마지막 순간까지 때까지 계속될 일일지도 모른다. 

붙잡고 싶은 것을 미련 없이 그냥 보내주지 못하는 건.


봄이 그다지 예쁘지 않게 찍힌 휴대폰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한 번도 잡혀준 적 없고, 잡혀줄 리 없는 

못내 아쉬웠고, 또 아쉬운 시간이 지금 나와 함께 있다고.


한편으로는 이런 궁금증도 든다.


나는 언제부터 봄을 간직하고 싶어 했을까. 

봄이 오면 설레고 좋아서 그날이 주는 모든 것을 

오롯이 느끼고 싶어 했을까. 하는.


어렸을 때는 봄이 오든 말든, 집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기 바빴다. 가상의 세계에서 그것이 삶의 전부인양 모든 에너지를 쏟고, 현실의 세계가 어떻게 변하든 관심이 없었다. 오직 특별한 재미와 게임이 주는 자극적인 즐거움만을 추구했다.


다소 식상하지만, 나이가 먹고 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이유 밖에는 별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좀 더 디테일하게 보자면 직장에 들어가고 보니, 자주 산책을 하다 보니, 먹고살 걱정을 하다 보니, 현실에 서게 되었고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정도일까?


경험은 모르던 것을 알게 한다. 내가 사는 실제 세상에 관심이 없었던 난, 나를 둘러싼 세상이 싹을 틔우는지, 하여 이내 꽃을 만개하여 세상의 찬란한 모습을 드러내는지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젊은 시절 학교를 오가며 많은 계절을 보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엇도 본 기억이 없다.


봄을 찍는 휴대폰 화면으로 저 멀리 사람들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황급히 그냥 무심히 걷고 있었다는 듯 머쓱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입안을 굴리던 사탕은 어느새 거의 다 녹아 플라스틱 막대 끝이 느껴졌지만 조금 남아있는 사탕을 혀로 굴리며 봄이 주는 생동감을 다시금 코로 들이쉬었다.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며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가 정답다. 들이쉬는 숨에 행복이 차오른다.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다른 이유가 없다. 그냥 이런 것이다. 행복은 어느 따사로운 날과 막대사탕 그리고 목적지 없는 걸음이다. 행복이 뿌려지고 나는 적셔질 뿐이다.


계속 걷다 보니 바람에 나직이 흔들리는 커다란 이름 모를 나무 밑이다. 나뭇잎에 햇살이 눈동자를 간지럽힌다. 손을 뻗어 햇살을 만져본다. 혼자 있는 이 순간에만 할 수 있는 일이라 눈을 찡긋 감아보기도 한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태양이. 춥지도 덥지도 않은 온도와 습도가. 봄날 바람이 날리는 은은한 부드러움이. 몸에 닿는 모든 것들이 적당해서. 마치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지금 나를 위해 준비된 게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들 정도다.


점심시간에 누리는 여유로운 산책. 많은 이들이 소소한 행복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에게 이 순간은 결코 소소하지 않다. 온 마음으로 누려야 하는 날이다. 그렇게나 기다렸던 봄이니까.


어린 나에게는 그저 스쳐가는 많은 계절 중에 하나였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깟 계절 중 하나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두 팔 벌려 고집스레 품에 안고 싶은, 파스텔톤 색연필로 예쁘게 그려 남기고 싶은 찬란한 날이다.


그것이 같이 있는 이 순간만큼이라도 

잡은 손을 꼭 쥐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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