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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Sep 10. 2020

나의 작은 영웅들

코로나가 가르쳐준 기적

근무지 건물이 폐쇄되었다. 여러 유관기관들이 입주된 꽤 큰 규모의 건물이니 올 게 왔구나 싶었지만 그간 무탈하게 넘긴 게 신기할 정도로 잘 버텨온 터라 시점이 아쉬웠다. 회사에서는 개인 일탈의 사유로 코로나 감염 시 문책한다는 공지뿐 아니라 출처만 다를 뿐 비슷한 내용의 추가 공지가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오고 있었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된 지 겨우 며칠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더 그랬다. 다들 눈치껏 동선관리에 조심하고 조금만 버티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있었는데 그걸 빼앗긴 듯한 심정이랄까? 조금은 허탈한 게 사실이었다.


우리 건물의 첫 번째 확진자는 가족 간 감염이라고 했다. 건물 폐쇄 전날 퇴근 후 확진자 존재를 알게 된 인사팀은 긴급 톡방을 개설했고 곧이어 다른 층 다른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이라는 정보를 공유했다. 당일 공지가 올라올 때만 해도 소속기관의 내부지침은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타 기관 대다수의 인원에 대해 재택근무가 결정되었음에도 그런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다 결국 다음날 오전을 넘기지 못하고 이 사단이 난 것이니 이틀 뒤 기사 속 먹잇감이 된 건 안타깝지만 임을 피할 순 없을 듯했다. 무엇보다 바이러스가 턱 밑 까지 쫓아온 것 같단 사실이 섬뜩했다.


건물 폐쇄 시각 나는 재택근무 중이었고 출근을 한 직원들은 갑작스러운 결정에 우왕좌왕했다. 강제 퇴실 조치가 이루어졌지만 바로 퇴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건소로 이동해 코로나 19 검사를 받으라 하니 그럴 만도 했다. 처음엔 폐쇄 당일 출근자만 검사받는 것으로 공지되었다가 건물 내 모든 직원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번복된 조치는 예방 차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건물 근로자가 천명이 넘었다. 이런 일방적인 처사에 일견 이해가 가면서도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일단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과잉대응이 부족한 것보단 낫다는 데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솔직히 검사소 노출이 더 걱정이었다. 모두가 밀접접촉자도 아닌데 이 검사가 과연 필요할까? 의문은 계속되었지만 그렇다고 우려만 하고 앉아있을 순 없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니 지침에 따라야 하고 결과를 회신해야만 했다. 잠시 망설이다 간단히 씻고 집을 나섰다. 보건소로 향하면서 운전하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검사는 얼마나 걸릴까? 학교에 가 있는 아이는 어떡하지? 결과는 언제 나오는 걸까? 학교에도 알려야 할 텐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나만의 선택으로 결정지을 수 없는 얽히고설킨 모든 부분들이 골치 아프게 다가왔다.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부서 톡방에선 먼저 검사를 받은 직원들이 회사 주변 보건소가 붐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예견된 상황이고 타 부서 직원의 언지도 있던 터라 나는 일찌감치 다른 구로 넘어가고 있었다. 어렵사리 주차를 하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보건소 앞을 들어서는데 먼저 도착한 직원 하나가 다른 구민은 검사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을 전해왔다. 갑작스러운 말에 기운이 빠지고 상심했지만 어디 하나 도움을 요청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바로 발걸음을 돌려 차를 뺐다. 운전을 시작해 막 코너를 도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인사팀에서 보건소에 확인해주어 해당 건물 근무자는 어디서든 검사가 가능하니 다시 돌아오라는 전화였다. 그 말에 한 바퀴를 다시 돌아 다시 주차를 시도하던 나는 또 한 번 그냥 거주지로 이동하는 것이 좋겠다는 연락을 받고 말았다.


이상하리만큼 화도 나지 않았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각자 사정이 있겠지 싶었다. 그저 무심히 흐르는 시간이 아쉬울 뿐이었다. 빨리 검사를 진행해도 모자랄 판에 시간이 지체되고 일이 꼬이니 천천히 늪에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차를 멈췄다. 도저히 운전할 정신이 아니었다. 비 오는 차 안에서 길거리에서 주차해놓고 암담한 상황에 참담한 심정으로 잠시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다 아이 반 톡방에서 내 소식을 접한 친구 엄마의 문자를 확인했다. 상황이 곤란하면 아이를 데리고 있겠다는 구세주 같은 말이었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이렇다 저렇다 따지고 잴 겨를도 없이 수락했다. 고민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 부탁 하마, 바로 답을 남기고 다시 보건소로 차를 몰았다. 근처에 차를 세우고 찾아간 보건소는 전에 내가 알던 그런 풍경이 아니었다. 간이 검사소가 세워져 있고 여기저기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들이 눈에 띄었다. 비가 오는 통에 우산을 받든 몇십 명의 건물 근로자들이 다닥다닥 붙어 인도까지 죽 늘어선 모양이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검사 대상자는 건물 내 화장실도 이용할 수 없단 사실에 당황했지만 우선 아이 문제가 해결되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상태였기에 더 이상 조급해하지 않고 최대한 협조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언제 차례가 될지 모를 순서를 기다리며 문득 아이를 데려가 주기로 한 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곰곰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여러 이유를 들어 집 근처가 아닌 멀리 떨어진 학교에 아이를 보내면서 내심 동네에서 입방아에 오르지 않고 조금은 익명성을 유지한 채 학교생활을 할 수 있단 사실에 안심했었다. 그런 내가 내 동선 모두를 공유하고 심지어 바이러스 검사에 노출된 상태로 같은 반 아이의 엄마에게 의지해 아이의 안위를 맡기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정말 삶이란 아이러니의 연속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마움과 세상살이의 아이러니에 빠져있을 즈음 하교를 하는 아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가타부타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엄마 얼굴도 보지 못하고 친구 집으로 가게 될 아이의 목소리는 의외로 씩씩했다. 그런 아이를 배려해 전화부터 걸어준 친구 엄마의 마음 씀씀이에 다시 한번 마음이 저려왔다. 아이는 조금 당황하기는 했어도 서로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는 설명에 금방 이해를 하고 잘 지내다 엄마가 데리러 오는 것을 기다리겠다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


검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뭐 대단한 일을 한 것 마냥 무척이나 지쳐있었다. 혹시 모를 노출에 대비해 몸을 씻고 빨래를 다 돌리고 그러다 잠시 휴식을 취한 상태로 내 몸이 편해지니 나 대신 고군분투할 친구 엄마의 수고로움이 그려졌다. 낮에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세세한 부분까지 떠오르며 가슴이 뜨끔해졌다. 당장 씻는 건 어쩌지? 아이 친구는 수영을 배우며 일찌감치 샤워를 혼자 하게 가르쳤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머리도 혼자 못 감는 아이가 민폐를 끼칠까 걱정이 앞섰다. 엄마와 떨어져 보긴 했어도 한 사람 손에서만 늘 품에 끼고 재운 터라 엄청 치댈 게 분명한데 이를 어쩔까 싶기도 했다. 심지어 검사 결과 나올 때까지 온라인 수업도 접속시켜 주고 다음날까지 데리고 있어 주겠다 했는데 수업에 끼니에 하나하나 너무 신경이 쓰이고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늦은 시각 당연히 아이가 잠들었을 거라 생각한 시간에 고맙고 고생했다는 문자를 남겼더니 아이는 조금 전까지 몸을 비비 꼬고 이불 끝을 만지작거리다 겨우 잠이 들었다고 했다. 그걸 옆에서 계속 지켜봐 주느라 무척이나 수고로웠텐데.. 짧은 기간 이제는 친구가 된 동갑내기 지인한테 고마운 마음을 넘어서 경외감마저 들었다. 하, 정말이지 딱히 누구라도 할 것 없이 모두가 고달픈 밤이었다.

결과는 음성, 눈을 뜨기도 전에 결과가 나왔다. 밤새 부지런히 기계를 돌린 덕에 빠르게 결과를 받아 볼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니 얼굴도 모르는 무수히 많은 수고로운 손길들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가장 기뻤던 건 갑자기 따끔따끔 목이 아프고 몸이 무기력해지는 증상과 기분을 입 밖으로 낼 수 있단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상상 코로나’라는 것을 겪은 듯했다. 다만 기뻐하기만도 부족한데 검사 대상자로 분류될 가능성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난단 보장이 없단 사실에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리고 한편으론 이리저리 검사받는 사람들만 늘어나고 일부 불필요한 검사도 진행되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대의적인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 기쁜 소식을 어서어서 주변에 알려 안심부터 시켜야겠다. 그렇게 한숨을 돌리자 거짓말처럼 이젠 태풍이었다. 태풍을 뚫고 아이를 데리러 가야만 했다. 고마움에 대한 내 마음은 택배에 담겨 배송되고 있었고 아이 친구가 좋아한다는 떡과 선물한 고기에 곁들일 절인 올리브 한 병을 들고 다시 한번 차를 몰았다. 마주한 두 엄마는 흡사 괴물들과 싸우고 돌아온 주인공 마냥 각자의 무용담을 털어놨다. 그리고 만에 한에 있을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고 아이를 맡아 주어 고맙다고 인사를 전하던 나는 오히려 자기네 가족을 위험에 처하게 하지는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울컥해졌다.  


모든 게 기적이었다. 해프닝을 무사히 넘긴 것도. 이런 따뜻한 말들을 나눌 수 있는 것도. 책에서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소소하게 내 주변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코로나에 태풍에 뉴스에선 연일 사상자가 나오고 각종 이슈들이 난무했지만 사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보지 않은 우리로서는 대단한 기적을 접하기는 쉽지 않았다. 많은 이들에게 마음으로 애도를 표하고 위로는 할 수 있을지언정 현실에선 내가 가장 힘들고 가장 절박한 상황이고 당장 일터에 나가고 무사히 학교에 보내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내 인생 전반을 흔들고 있는 코로나 시국 속에서 내 일처럼 손 내밀어 주는 친구가, 바이러스든 태풍이든 그저 해맑게 학교로 향하는 내 아이가 나에겐 진정한 영웅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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