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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Apr 07. 2021

영어 갈림길, 엄마가 결심해야 할 때

엄마와 함께라면 할 수 있어요

유아기 학습을 따로 시키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엄마의 마음을 어찌 그리 잘 알고 있는지 아들은 한글, 연산 등에 큰 관심이 없었다. 영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일곱 살 무렵 약간의 의도를 가지고 틀어준 영어 DVD는 우리말 아닌 거 틀지 말라며 일언지하에 거부했고 그래서 우연한 기회에 손에 들어온 유명한 영어 프로그램 회사의 신나는 영어 노래만 유치원 등하원 시 들으며 지냈다. 어쩐지 그건 끄라 소리가 없어 마음속으로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쉴 정도였다.


그 노래가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나는 노래 가사를 생활영어로 접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한 문장 한 문장을 무식하게 받아 적어 스크립트를 만든 후 아이에게 자기 전 읽어주기 시작했다. 천천히 읽어주고 뜻을 알려주면 노래 가사가 아이 귀에 쏙쏙 들어가 박힐 것만 같았다. 아이는 문장을 통해 학습을 시도하려는 엄마의 의도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바로 거부했다. 딱 1년간 잘 듣던 노래마저 이제 고만 듣고 싶다고 했다. 겉과 속이 달랐던 행동을 들킨 것 같은 민망함에 그 뒤로 다시는 그 노래를 틀지도 못했다.


그렇게 아이는 학교 '입학안내지' 영어 파트에 쓰여 있는 Boy도 읽지 못한 채 영어라곤 노래만 들어보다 지금 학교에 들어갔고 학교 와서 배우면 된다고 해주신 교감선생님의 말씀을 엄마도 아이도 철썩 같이 믿으며 다른 시도는 하지 않고 지냈다. 알파벳의 대문자와 소문자도 구별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흔들리는 마음 없이 가끔 스물여섯 자를 써보라고 하며 꼬물꼬물 그려대는 글자를 귀엽다고 바라봐주고 있었던 그야말로 해맑은 ‘모자’였다.

코로나와 함께 시작한 아이의 1학년은 그저 학교 가는 게 감사한 시기였기에 학습에 대한 푸시를 할 수 없었음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방학을 앞둔 7월경 영어 관련 평가를 진행한다는 공지를 받고 나서야 받아쓰기나 익힘책 과제처럼 그냥 아이가 알아서 하게 두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과정과 아이 수준을 살피고 점검을 해줘야 하는지 감이 잘 서지 않아 처음으로 제대로 된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하교 시 사물함에서 교재를 챙겨 와 한 장씩 넘기며 집에서 봐주는데 아이는 대단한 고백이라도 하는 듯 잘 모르겠다고 했다. 지금 하고 있는 파닉스 단모음 진도뿐 아니라 그동안 원어민 선생님 말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부연설명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며칠간 본격적으로 아이 영어 학습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조금 눈이 트인 아이는 시험을 수월하게 치르고 와서 무사히 넘긴 시험을 두고 이게 다 엄마 덕분이라고 말해주었다. 정말 단순한 시험이었고 별거 아닐 수도 있는 평가였지만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는지 아이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런 아이를 보자 젊은 시절 몸담았던 영어학원에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쳤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이러려고,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려고 그 치사한 학원 선생 시절을 겪었나 싶을 정도로 지난 경험이 보람찼다. 한편으로 사립학교에 보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으나 그것도 아주 잠시 2학기도 너무 어렵지 않은 수준에서 계속 비슷하게 반복이 되어 출퇴근과 아이 픽업만으로도 힘든 워킹맘의 삶에서 영어는 잠시 잊힌 채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다 새 학년이 되어 아이 교재비 납부 안내서를 보다 우연히 다른 친구들과 아들의 교재가 다른 것을 인지하게 되었고 학교에선 분반 결과를 알려주지 않았지만 다섯 반중 두 번째 반에 배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게 집에서 차근차근 챙겨 왔다면 나름 학원 안 보낸 엄마표로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어 약간의 우쭐한 맘이 들기도 했겠지만 작년 일 년 내내 a는 ‘애’ ‘애’ ‘애’ 하다가 해가 바뀌었는데 이게 무슨 경우인지 정말로 어리둥절했다. 학교에 문의해볼까, 앞뒤 상황 아무리 따져 봐도 아이한테 무리가 될 것이 뻔한데, 이를 어쩌면 좋을지 한동안 머릿속이 복잡했다.


실수로 분반이 잘못된 게 아닐까?

등하굣길 영어노래 조금 들었다고 영어가 익숙할 수 있나?

리딩 책 조금 읽어주며 재웠다고 알아듣게되는 건 무리지 않을까?

심지어 영어빼고 듣고 싶다면서 번역부분만 집중해 들었는데?


가랑비에 옷 젖듯 아이의 실력이 쌓인 거라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절대적인 양이 부족했고 객관적인 사실이 그러했다. 아이 학교에 함께 입학한 아이들 중에는 영어 학원 유치부를 졸업한 아이들도, 해외서 살다 돌아온 흔히들 말하는 리터니들도, 대형학원 다니며 화상영어 수업까지 병행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 실력으로는 반배정이 잘못된 게 분명하다는 생각과 함께 예상보다 많은 엄마들이 나보다 영어공부를 더 안 시키거나 내가 해준 방식이 정석이거나 뭔가 답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 경험치론 도저히 알 수가 없어 정말이지 답답한 마음이 커졌다.

이를 계기로 아이의 성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이는 2학년 초 1학년 과정 진단평가에서 두 과목 백점을 맞았을 때 뿐만 아니라 2학년 과정 첫 단원평가에선 잘 모르고 시간이 없단 이유로 백지를 내다시피 해 무득점 상황을 접하고도 엄마한테 딱히 말이 없는 그냥 학교생활을 되도록 알아서 하는 아이였다. 좋게 말하면 그냥 딱 아는 만큼만 해나가는 아이, 대신 알게 해 주면 잘할 수 있는 아이. 그러니 언제든 좀 달려보자 하면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아 아이가 갑자기 무리하는 수준으로 학습량을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계속 지치지 않고 살살 갔으면 싶었다.


작년 한 해 여러 면으로 코로나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1학년을 망쳤다는 생각보다 모든 것에 적응해야 하는 시기에 슬렁슬렁 지낼 수 있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고 추억할 만큼 과거 미화에 능한 엄마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뭐든 흥미 있게 접하고 학교 가는 게 즐거운 아이가 발맞추어 나가다 보면 보통 수준 이상은 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자신도 아예 없진 않았다. 그래서 올해 교과수업 외 방과 후 수업도 신청 안 하고 따로 배우고 싶다는 바둑과 수영만 하며 지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교재가 어려워지고 갑작스러운 진도 차이에 이제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라는 감이 왔다. 이런 짙은 고민에 ‘두 번째’ 반이 뭐 큰 대수라고 오버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반의 등급보다는 정확히 교재 난이도에 대책이 서질 않았다. 급해진 마음으로 교재를 살펴보다 month와 day를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나도 모르게 핀잔을 주고 말았다. 여러 번 반복해주는데도 모르면 하지 말라는 엄마의 미운 말에 아이는 볼멘소리로 눈물을 삼켰다. 펜싱도 과학도 다 재밌는데 왜 갑자기 영어만 어려워진 건지 아이는 도저히 자기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배움에는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데 선생님 말은 귓등을 스쳐가고 교재는 빽빽해졌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가장 두려운 건 그 누구도 아닌 아이였는데 나 편하자고 쉽게 모진 말을 해놓고 보니 나는 아직도 수행이 더 필요한 엄마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그저 있는 대로 사랑하겠노라 다시 한번 다짐하며 마음을 다잡아주는 육아서를 읽고 영어에서 엄마표로 유명하다는 책을 파고들다 보니 어느 정도 길이 보이는 듯했다. 유아기보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가 영어 배우기 적당한 시기라는 말도 굉징히 솔깃했다. 유튜브를 검색해 엄마표 영어 저자들의 강연을 듣고 책에 밑줄을 긋고 읽으며, 딱 2년만 영어에 집중하기로 결심을 했다. 이것저것 영어 노출 자료를 구입하면서 사교육에 흔들리지 않겠다던 내가 이래도 되는 건지 혼돈이 오고 갑작스레 너무 몰두한 느낌에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지만 최소한 우리가 선택한 학교에서 하는 건 따라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나니 맘이 편안해졌다.


아이와 몇 번의 대화를 나누며 어렵지만 엄마가 도와주면 다른 반으로 내려가는 건 고려하지 않겠다는 아이의 뜻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선택을 지지하고자 다시 한번 교재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이걸 소화만 한다면 정말 실력이 많이 늘겠다 싶었다. 하지만 실력 늘리자고 갑자기 이걸 다 씹어 삼키라고 강요한다면 아이는 체할 것이 분명하기에 학교에서 나가는 진도는 진도대로 구멍이 좀 생기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학교에서 이 교재를 선택한 이유가 있겠거니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는 학교에서 아이의 가능성을 본 것이라고, 교과내용을 보충하거나 선행하는 학원을 다녀보지 않은 아이가 학교의 모든 수업에 집중하고 재밌게 받아들이고 있는 거라 나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나대로 방안을 강구하기로 했다. 정답 없는 외국어 배우기에 엄마가 나선다고 뾰족한 수가 있을까? 다만 과도한 인풋은 지양하고 아이의 어려움은 모른척하지 않는 선에서 내 역할을 다하다 보면 희미한 길이 좀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 싶은 자신은 있었다. 영화 대사를 그대로 흉내 내고 뉴스 스크립트를 외우게 하고 엄격한 방식으로 실력을 향상할 수 있는 방법이야 많겠지만 그게 과연 지금 나이의 아이들에게 학습법으로 적합할까 아직도 의문이 남는다. 어려워야 잘 팔린다는 한국의 사교육 시장에서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때가 아니기에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지껏 버티고 기다렸던 것처럼 집중은 하되 아이가 영어로 과식하지 않고 적당한 양을 섭취할 수 있도록 옆에서 보폭을 맞춰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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