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급한 마음에 다니던 학원을 내 마음대로 정리해놓고 슬쩍 아이의 입장을 묻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들은 과학이 ‘재밌어서’ 더 배우고 싶어 했다는 것과 영어는 친구들보다 ‘못하니까’ 더 배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흥미와 부족함을 알고 더 배우려고 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엄마는 충분히 기특한데 지금 그걸 깨닫기엔 아직 역부족인가 보다.
아이가 어찌 생각하든 지금 시기 엄마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이의 생각과 조금 다르다. 그래서 한국 나이 아홉 살에 아이가 갖춰야 할 학습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를 다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학령에 맞춘 기본기는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와 강조하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건 바로 그리기 포함 미술활동, 받아쓰기, 일기 쓰기, 독서록 이 네 가지이다.
공교롭게도 엄마가 초저에 갖춰야 할 능력으로 꼽는 것과 학교에서 내주는 과제가 일치한다. 앞선 글에서 몇 번 언급했던 대로 지금아이에게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부분 중 하나가 잠자리 독서다. 좋은 책을 열심히 골랐고 많은 돈을 지불해 책들을 구매했고 시간을 내어 책을 읽어주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학교에서 강조하는 초저학년의 학습적 능력을 충분히 갖췄다고 믿고 있고 학습적으로 크게 푸시하지 않은 채 초저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아이는 이 모든 능력을 그림책을 통해 갖췄다.
1. 그림책 속의 그림 덕분이다.
1, 2학년에는 많은 활동이 그리기와 만들기로 이뤄진다. 무엇을 그리고 만들든 주저함이 없는 아이는 선을 그리는데 과감하고 색감도 좋다. 무엇보다 꼼꼼히 칠하는 편이다. 가끔 교과 활동에 대강 그리고 넘어가도 좋을 그림까지 진심으로 그려 대서 골치가 아플 정도이다. 비율과 색감을 중시하는 아이를 보며 이건 모두 그림책을 통해 예쁜 그림을 많이 보고 자랐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2. 그림책을 듣고 자란 덕분이다.
두 번째로 매주 꾸준히 하는 활동이 받아쓰기이다. 받아쓰기는 듣기 능력이라는 한 문제지 회사의 말을 신봉한다. 그래서 받아쓰기는 외워서 쓰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기술만 터득하고 나면 그 뒤부터는 들어서 풀어내는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이는 듣는 귀가 발달해서 딱히 연습을 하지 않고 간 날도 받아쓰기를 거의 맞춰온다. 학기초엔 한 번씩 써보게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안 한다. 한 문장을 다섯 번씩 열 번씩 쓰고 오는 친구들도 있는데 그렇게 연습량이 많은 공부는 아이보단 나와 맞지 않는다.그래서 그런 연습을 하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백점은 못 맞는다. 띄어쓰기에서 5점씩 감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 정도면 양호하다고 생각한다.
3. 그림책 다독 덕분이다.
하루하루에 충실한 아이라서 그런가, 아이는 주 단위, 월 단위 일자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어저께와 그저께란 단어도 혼용하고 며칠 전에 있었던 일도 어제였다고 헷갈린다. 그렇게 정신없는 아이에게 일기를 쓰라고 하면 처음엔 그날이 언제였는지부터가 고비다. 하지만 딱 날짜와 날씨만 확인하고 글감을 잡고나면 아이는 무언가에 접속한 듯 혼자 일기를 써 내려간다. 다섯 줄을 겨우 넘기는 날이 있는 반면 어떤 날은 그만 쓰라고 해도 한 바닥을 넘겨쓴다. 그저 몰입하고 생각나서 흘러나오는 대로 적어간다. 단조로운 일상에 참으로 성의껏 쓰는 것이 감동적이기까지하다. 엄마가 과학을 끊어서 속이 상했는 것도 아이의 일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사생활 침해를 이유로 일기를 안쓰는 학교도 있다지만 지금 시기엔 아이와 교감하고 아이를 더 알아가는데 더할나위 없이 좋은 도구라고 생각된다.물론 반복되는 말이 많기도 하고 앞뒤 호응이 어색하기도 하고 너무 짧은 단문이라 아쉬울 때도 있지만 늘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여길 정도로 잘 쓰는 편이다. 고슴도치 맘이라고 생각되어 크게 의미를 두지 않으려 할 무렵 '일기를 참 잘 쓰는구나'라는 선생님의 답글이 아이를 인정하는데 다시 한번 큰힘이 되었다.
4. 무조건 그림책 덕분이다.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가 딱 받아쓰기, 일기, 독서록 이 세 가지인데 받아쓰기와 일기는 그럭저럭 해가는 편이지만 아이가 가장 재능을 보이는 것은 그림책을 듣고 한 줄로 요약하는 능력이다. 나는 독서록을 혼자 쓰라고 하지 않고 그림책을 읽어준 저녁에 말로 요약시키고 그걸 휴대폰에 저장해놓은 다음 그다음 날 보고 쓰게 한다. 그러면 잠들기 전에 다시 쓰고 자야 하는 부담감이 없어 편하고 다음날은 전날 들은 내용을 기억해 내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어 편하다. 1학년 때는 이 활동을 학기별 백 권씩 달성했다. 물론 실제 읽은 책이 훨씬 많고 독서록에 남기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나는 가끔 시간이 될 때 휴대폰 메모장을 열어 아이가 불러 준 글들을 다시 읽어보곤 할 정도로 아이의 독서록은 새로운 하나의 세계다.
초등학교를 넘어서 중고등학교까지 학습의 대부분은 읽고 해석하고 쓰는 능력으로 이어진다. 지금은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지만 이미 이러한 능력을 갖춘 아이는 시간을 들여 집중하고 암기하고 문제집을 통해 연습하면 충분히 자기 몫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영어도 문장으로 말하면 무슨 뜻인지 알지만 단어 철자는 쓸 줄 모르는 아이에게 아직 스펠링 암기나 쓰기를 강요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소스 삼아 심도 있는 과학이야기를 해주는 책도 집중해서 잘 듣는 아이가 제학년 수준의 교과내용을 이해못할리 없다는 확신이 있다. 아이가 이런 장점을 아직까지 특별한 능력이라 생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부족함을 인지하고 있어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요즘 꽤나 꾀가 들던 차였는데 쓰다보니 다시 한번 그림책 읽기에 열과 성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앞으로 딱 2년만 지치지 않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