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죽음이다.
몇 주전, 친한 동생과 티타임을 가졌고 티타임중에 동생은 휴대폰 카톡을 확인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였다. 나 또한 함께 만난 적이 있는 친구였기에 남일 같지 않았다. 밤중에 자다가 돌아가셨다는 비보와 함께 다음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그날, 필로소피라는 철학잡지 마지막 페이지에서 어떤 철학자이자 편집장의 자문자답 페이지에는 이러한 질문이 있었다. Q.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원하는 죽음은? A 자는 동안 편안하게 죽는 것.
그 주에 아는 동생 아버지의 장례식을 방문한 나로서는, 와 닿지 않았다. 아니면 그 철학자라는 사람은 실제로 본 적이 없기에 그렇게 멋들어지게 이야기했나 싶을 정도였다. 자는 도중에 맞는 죽음이라면, 한마디로 너무 허무할 거 같다. 모든 일을 준비하고 예견할 수 없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큰 이별을 맞이한다는 것은 그리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본인도 남겨질 주변 사람들도.
고등학생 시절, 우리 반 급훈은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갖는다."였다. 돌이켜보면 인생은 늘 준비된 자에게 좀 더 유리한 확률이 가는 법이 맞다. 하지만, 죽음까지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주변 사람에게 그렇게 갑작스러운 이별을 바라보니, 새삼 내가 살고 있는 삶도 허무해질 수 있겠구나 생각 들었다. 죽음은 무엇이길래, 이렇게 잔인하면서 인간에게 유한함을 알려주는지 생각해본다.
내가 죽음을 느끼는 순간은 해외여행에서이다. 유럽을 가든, 미국을 가든, 스리랑카를 가든, 여행 막바지가 되면 으레 생각이 된다. 내가 이 나라, 이 사람들과 죽을 때까지 다시 마주할 기회가 있을까?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이 내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보고 만나는 마지막 일수 있겠다. 바로 출국하는 순간 나는 여행지에서는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짧은 여행이지만, 매 여행 때마다 난 죽음을 마주한다. 그래서인지 여행지에서는 밤새 돌아다니고 놀아도, 전혀 피곤하지 않다. 며칠 후면 다른 세계로 떠나는 죽음을 앞에 둔 사람에게 하루하루는 너무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을 다녀오면 인생의 유한함을 그 어느 때보다 느끼고, 내가 속한 세상에서 더 가치 있게 살 수 없을까? 생각한다. 코로나 시국이라 해외여행을 못한 지 2년이 되어가는 순간, 지난주는 새로운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삶의 유한함을 자주 느낀다면 게으름이나 신세한탄은 나와는 먼 이야기가 될 것이다. 스티브 잡스처럼 매일의 유한함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내일이 되고 싶다.
"죽음 또한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