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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블 Sep 06. 2021

4월과 5월 사이

짜장면


20대 초반, 뒤틀린 자아와 불안한 미래로 하루하루를 갉아먹을 때가 있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한 데 따른 처참한 관계의 실패도 맛봤다. 그때마다 내 곁에 있어준 건 엄마와 지금의 남편이었다.


사람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인지, 나만의 문제인 것인지 주변인의 넘치는 사랑이 감사하면서도 감사하지 않았다. 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한 게 늘 미안했지만, 더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없었다.


봄의 한가운데 들어선 어느 날, 마음의 고름은 몸으로 전이됐고, 나는 곧바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때도 내 곁에 있어준 건 엄마와 지금의 남편이었다. 엄마는 입원기간 내내 내 옆을 지켰고, 구 남친이자 현 남편인 그는 병원으로 출퇴근을 했다.


병실에서 바라본 창문 밖 꽃들은 이미 만개할 대로 만개했지만, 왜인지 병원만은 찬기가 돌았다. 좀먹은 시간 사이에서 그가 들어왔다. 새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환한 미소와 함께. 쭈뼛쭈뼛 꽃송이를 내미는 그의 손이 따뜻했다.


그에게서 처음 받은 꽃이었다. “이제 곧 로즈데이래서….” 얼굴을 붉히는 그의 모습과 내 모습이 닮았을까.


며칠 뒤 거짓말처럼 훌훌 털고 나온 병원 밖은 어느새 여름 맞을 채비를 하는 듯했다. 퇴원길 마지막 코스는 중국집이었다. 엄마는 오빠에 대한 고마움과 나에 대한 걱정을 짜장면으로 대신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짜장면은 미안한 눈물에 막혀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내 입원으로 엄마의 봄소풍을 망쳤다는 걸 알았다. 20년 넘는 시간 동안 본인의 과업인 양 가사와 육아, 바깥일을 묵묵히 해온 엄마가 거의 처음으로 나선 길이었다. 설레는 마음을 고속도로에 내려놓고 택시를 타고 내가 있는 병원까지 내달렸다는 걸 들은 순간 병원에서 엄마와 눈을 마주쳤을 때보다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쯤부터 병원과 짜장면, 엄마가 한 몸처럼 따라다녔다. 병원을 지나가면 자주 엄마 생각이 났다. 짜장면을 먹으면 더 자주 체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8할이 엄마의 사랑과 노력이라는 걸 안다. 나의 엄마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난 여전히 미성숙한 인격이었을 것이다. 사회생활이든, 인간관계든.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더 잘 살아내고 싶은 욕심으로 버텼는지도 모른다. 내 마음이 늘 4월과 5월 사이, 차가웠지만 따뜻하고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그 감정을 안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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