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지나간 자리 2
마침 대문이 훤히 열려 있었지. 우리더러 당장 올라가 보라는 신호 같았어. 서른 개 정도의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마주한 옥탑은 10년 전의 그것과 달라진 게 없었어. 초록빛 바닥, 주인 할머니의 취향이 반영된 화분들, 담장 너머로 보이는 대학동 풍경. ‘마당이 이렇게 좁았었나?’ 하는 너를 보며 나는 ‘예전에는 컸지.’하고 조용히 읊조렸어. 아마 그땐 우리에게 전부인 곳이어서였을 거야. 자주 빨래를 널고 석양을 보던, 때로는 돗자리를 깔고 대패삼겹살을 구워 먹던, 또 어떤 때는 함께 만든 눈사람이 놓여 있던 공간. 갖가지 추억들이 기억 속에서 공간을 넓힌 것 아닐까. 우린 옥상에서 보이는 풍경을 말없이 카메라에 담았어. 마지막이 될 이 풍경을, 너도 오래도록 남기고 싶었을 거야.
10년 전 우리가 함께 했던 장소들을 기억의 동선 따라 거니는 동안 너는 어떤 생각을 했니? 나는 스물다섯의 나로 돌아가 있었어. 철 없이 어렸던 나에게 ‘지금이 행복한 순간임을 잊지 마.’라고 속삭이고 싶었어. 그리고 똑같이 어린 너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눈빛을 건네고 싶었어. 느꼈니? 고시촌 골목길, 서울대 교정, 5515 버스, 행운동 성당, 가로등 아래 담벼락. 모든 곳에 어렸던 우리를 두고 오자. 두 사람은 오래도록 영원토록 그곳들에 머물고 있을 거야.
짧은 꿈이 끝날 무렵 낙성대역 5번 출구로 걸어가던 길, 느껴지던 너의 초조함을 기억해. 네 손끝이 차마 내 손으로는 향하지 못하고 어깨에 걸친 내 외투 소매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거든. 더 이상 헤어짐이 아쉬워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는 어린 날의 우리가 아니지. 아니어야 하지. 덤덤하게 건넨 ‘나 이제 갈게.’ 그게 우리의 마지막 장면이었어.
오늘은 네 달 전 우리가 마주했던 가로수길에 다시 왔어. 잔뜩 긴장한 얼굴의 당신, 수시로 비워진 물병을 채우러 가던 뒷모습, 미리 나가 담배를 피우고 내가 나오길 기다리던 얼굴이, 아직 선명하네. 따가운 햇살이 가득했지. 여름이었잖아. 카페를 찾아오느라 꽤 걸어서인지 땀이 살짝 배어있는 네 셔츠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생각해 봤어. 다시 8월로 돌아간다면 나는 당신을 만날까. 쉽게 답할 수 없을 것 같아. 오랜 시간 곁에 없다가, 잠시 곁에 있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공허가 가끔은 견디기 힘들 정도라서 차라리 만나지 않고 막연한 그리움과 아련함을 가지고 일상을 살 걸. 하는 쓰라린 후회도 있지. 하지만 우리가 다시 만나 서로에게 따스함으로 남았다는 건 너무도 귀해서 마치 생각지도 못한 덤을 얻은 것 같아.
지금 내 옆 테이블에는 결혼을 앞둔 커플이 앉았어.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가려나 봐. ‘피렌체’를 비롯한 낯선 단어들이 들리네. 참 설레 보인다. 마음 잘 맞는 두 사람이 같은 목표를 가지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인생의 흐름을 함께 한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 당신도 그리 살아야 해. 우리 둘 중 한 사람만이라도 그런 삶을 산다면 절반은 괜찮은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