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는 나에게 뭐든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 했다. 어린 내가 하고 싶어 하면 안 된다고 하는 법이 없었다. 핸들을 돌려보고 싶다 하면 널찍한 운동장으로 차를 끌고 가 아빠 무릎 앞에 앉혀주었고, 아빠 신발을 신어 보고 싶어 하면 커다란 구두를 신겨 골목을 활보하게 해 주었다. 아빠가 피우는 담배의 맛을 궁금해하는 나에게 한 모금 빨아 보게끔 입에 담배를 물려주었다면 말 다 했지. 내 어린 시절 모습이 담긴 앨범을 펼치면 발이 모래에 더러워질까 내 몸을 들쳐 안고 바닷물을 보게 하는 엄마와, 애초부터 발을 모래사장에 디디게 한 뒤 바닷물을 만져보게 하는 아빠의 사진이 대조적으로 담겨 있다. 우리 아빠는 그런 아빠였다.
내가 열세 살이 되던 해, 아빠는 나를 서면 은아극장으로 데려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섯 살일 때 <쥐라기 공원>을 보러 갔던 희미한 기억을 제외하고는 머리가 자란 후 첫 영화관 방문이었다. 그날 아빠가 고른 영화는 배우 김하늘, 유지태가 나오는 영화 <공감>. 팝콘을 들고 달뜬 마음으로 상영관에 입장했다. 하필 맨 앞자리였던 터라 목이 꺾어질 뻔했지만 고소한 팝콘 탓인지 영화에 몰입했기 때문인지 나는 침을 게게 흘리며 영화를 보았다. “씨큐, 씨큐.” 시간을 넘나들며 무전을 주고받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는 어찌나 설레고 신선했던가. 엔딩크레디트까지 살뜰히 보고 상영관을 나왔다. 잊지 않고 포스터도 챙겼다. 그것을 학교에 매일 들고 다니는 파일 표지로 한참을 썼다.
얼마 뒤 나는 아빠와 한번 더 영화를 더 보러 갔다. 머리와 수염이 연갈색인 아저씨가 섬에 표류하면서 배구공과 친구가 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그날은 큰 스크린에서 배경과 자막을 동시에 읽어내야 해서 정신이 없었다. 조금 보다 보면 적응이 될 거라고 옆자리에 앉은 아빠가 말해주었다. 영화가 끝난 후 어김없이 포스터를 챙겨 나왔고,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영화 속 배구공이 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여운으로 지난 20여 년간 그 영화를 다섯 번은 더 보았으므로 아빠와 함께 본 영화들은 대부분 인생 영화가 되었다 해도 무방하겠다.
<캐스트 어웨이> 이후 아빠와 영화를 보러 간 기억은 없다. 고학년이 되면서 학업이 바빠진 탓도 있겠지만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신나는 나이였다. 시험 기간이 끝나면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은아극장이며, 대한극장에서 <집으로>, <시월애>, <실미도>와 같은 영화를 즐겼다. 만 15세가 되기 전에는 보호자 없이 15세 관람가 영화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지나가는 어른들을 붙잡고 예매 좀 해달라 부탁하기도 했다. 대학생이 되고서는 남자친구와 DVD방에서 영화를 즐겼으며(물론 영화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졸업 후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에는 도서관 멀티미디어실에서 이어폰을 끼고 혼자 보는 영화를 즐겼다.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를 즐겼지만 내게 영화 감상이라는 취미를 갖게 한 최초의 주역은 아빠였다.
나는 자라서 아빠를 닮은 엄마가 되었다. 아이가 물감을 실컷 가지고 놀게 욕실에 판을 벌려주기도 하고, 달걀찜을 만들기 위해 달걀 깨기부터 재료를 넣고 휘젓는 것까지 아이가 하게 한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만져보게 하는 나의 모습은 아빠의 그것과 닮았다. 얼마 전, 여덟 살 아이와 함께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에 빠져든 아이의 모습을 보며 아빠와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았던, 2000년도의 그날이 떠올랐다. 나는 그날을 아직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아빠 덕분에 이제 내 아이에게도 그런 따스한 기억을 남겨주게 되었다고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경상도의 딸 아니던가. 낯 간지러운 말로 서로가 어색해지기는 싫었다. 대신 집으로 돌아와 아빠가 좋아할 것 같은 영화를 찾아 같이 보러 가기를 제안했다.
ㅡ 아빠, <아바타 2> 보러 갈래? 아이맥스관에서 보면 너무 좋대.
그렇게 우리는 한 시간 거리의 아이맥스관을 찾아가 3d 안경을 끼고 세 시간짜리 영화를 나란히 보고 나와선 영상미와 스토리와 CG의 대단함에 대해 담소를 나누는 훈훈한 결말을 맞이했…다면 좋았겠지만 틀렸다. 나는 단박에 거절을 당했다.
ㅡ 별로. 요새는 영화가 다 재미가 없어. 혼자 보고 와.
담백한 제안으로 찐한 진심을 전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