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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논지 Dec 13. 2023

기적

-2023


1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떠나고 없었다. 분명 내 앞에 있었는데, 없다. 잠시 꺼져 있던 청각이 다시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환호가 그러데이션처럼 밀려왔다. 청각과 함께 꺼져 있던 시각도 돌아왔다. 조금 전까지 내 눈앞에 있던 그가 멀찍이 달아나는 뒷모습이 선명해졌다. 마음속에 아쉬움이 일렁였다. 그가 자주 입는 재킷의 보드라운 감촉과 손등의 온기 만이 내 손바닥에 남았다. 잊지 말아야 해. 영원히 간직해야 해.

 2.5프로의 확률로 얻게 된 5초 간의 황홀경, 믿기지 않겠지만 그 찰나가 2023년의 절반을 버티게 해 주었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단단해졌다.*


2

 “엄마가 너무 속상해서, 빵을 잔뜩 사 왔지 뭐야.”

 어린 자녀를 두고도 올해 이 문장을 실험(?)해보지 않은 엄마가 있을까.

 여덟 살 연우는 어릴 적부터 숫자와 놀고, 숫자를 가지고 놀고, 숫자와 함께였던 아이라 이과적 성향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얘는 mbti도 분명 T일 거야. 즤 아빠를 닮아서 정확하다 못해 융통성이 없잖아?’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디오를 켜고 문장을 뱉어보았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속상했어? 응? 아직도 속상해?”

 전국의 여덟 살 중에서 열 번째 안에 꼽힐 빵돌이인데 내가 무슨 빵을 사 왔는지는 추호의 관심도 없다. 대신 걱정 가득한 눈망울로 내 눈을 맞추며 예쁜 말들을 고요히 건네는 것이다. 심지어 자그마한 양손으로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말이다. 내 생애 이렇게 따듯한 위로를 건네받은 적이 있을까. 요 따스한 아이를 내가 낳았다니! 눈물이 왈칵 났다.

 무슨 일로 속상했는지 끝까지 알고 싶어 하는 연우에게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 뱉은 대답은 이러했다.

 “똥이 마려운데 아무리 힘을 줘도 안 나와서 매우 속상했지 뭐야.”

 황당해할 것이라는 예측은 완벽히 빗나갔고, 여덟 살 연우는 나에게 똥이 잘 나올 수 있는 자세 두어 가지를 끝까지 친절히 알려주었다.


3

 개지 않은 이불이 거슬리지 않기 시작했다. 설거지 후 싱크대에 잔뜩 남아 있는 거품을 보아도 큰 타격을 받지 않게 되었다. 연우에게 건네는 행동과 말들이 자극 없이 귓가에 들려온다. 뭐지? 나 왜 이러지? 원래대로라면…

 이불을 개지 않고 출근하는 뒷모습을 향해 “아니, 본인이 누워 잤던 이불은 개고 가라고! 적어도 저렇게 소똥처럼 돌돌 말아두지는 말든지.”라고 외치거나, 말끔하지 않은 싱크대 앞에서 한숨을 푹푹 쉬며 “이럴 거면 설거지한다고나 하지 말지. 꼭 뒷정리를 하게 만든단 말이야!” 볼멘소리를 한다거나, 연우에게 상처가 될(것 같은) 행동과 말을 기억해 뒀다가 늦은 밤 혹은 새벽녘에 ‘오은영 박사님이 그러는데…’로 시작하는 장문의 메시지를 무겁게 남겨놓거나 했을 것이다.

 변화를 가져온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8월에 복직을 하며 마음을 어느 정도 비웠다. 크고 작은 모든 것을 내 맘에 차게 만들려면 아마 나는 한 달 안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눈과 귀에 들어오는 여러 자극들 중 무시할 수 있는 것들은 못 본 체, 못 들은 체하려고 애썼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 경험했다.

 두 번째, 얼마 전부터 남편이 직장에서 비폭력 대화를 배워왔다며 써먹기 시작했다.

“기름 묻는 그릇은 따로 모아줄 수 있을까?”, “답장이 오랫동안 없어서 답답했겠네.”

 평소 남편의 말투가 나를 공격한다고 생각해 왔던 나는 모범적인 비폭력 문장에 노출되며 움츠렸던 몸을 펴기 시작했다. 내가 이토록 웅크리며 살고 있었구나. 그러니 집에 있으면 온 만신이 아프고 불편했지.

 두 가지 이유 중 무엇이 직접적인 원인인지, 두 이유의 합작품인지, 아예 생각지도 못한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드디어! 집과 그 속에 있는 내가 편안해졌다. 눈에 띄는 변화가 신이 나서 일부러 더 웃게 되고, 더 다독여주며, ‘이 정도면 됐다.’는 만족으로 하루를 맺음하고 있다는 것, 그게 기적이 아니면 무얼까.

 아, 물론 그렇다고 ‘이제부터 그와의 백년해로를 꿈꾸게 되었다.’는 뻔한 결말은 아니다. 나의 꿈은 여전히, 15년 뒤에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이다. 그 다짐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문장을 글 속에 남겨둔다.




*

1은 2023년 5월, 최애하는 다나카의 전국투어 콘서트에서 ‘정수리 지명’을 당한 경험을 푼 것이다. 나에게 2023년은 다나카(김경욱)가 8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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