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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솔 Aug 05. 2022

평범함에서 평범함으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영화. 여름 장마철에 맞춰  보는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영화를 처음  것은 중학교 3학년, 16 때다. 어린 나이였을 때부터 시대별, 장르별 따지지 않고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 영화광.  전혀 아니었고, 그저 설경구가 좋았다. 다들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오빠들의 이름을 목놓아 외칠   구석탱이에서  홀로 설경구, 박신양, 김주혁 등등..  외치며 30,40 아저씨들을 조용히 좋아했던 16살의 독특한 . 어쩌면 나의 외골수적인 성향이 한몫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독특한 내가  맘에 들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30대가  지금의 나는 왜인지 아저씨를 싫어하게 되었지만... 아무튼 그때는  영화가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인지 전혀 몰랐었다. 근데 그럴 법도   16살이 30 초반의 일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었겠나.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의미의 장면인지 이해가  안 되니 ‘재미가 없다  당연하고 솔직한 감상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영화를 좋아했던 것은 강철중의 강철중이니, 박하사탕의 김영호니, 오아시스의 홍종두니.. 너무  캐릭터만 많았던 그의 필모에 전혀 반대되는 캐릭터, 완전히 다른 모습의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설경구가 이런 영화도 찍는구나. 이런 연기도 하는구나. 이런 얼굴도 가지고 있는 배우구나.  관전 포인트라면 관전 포인트였을 것이다. 그리고 굳이 그의  작품들과 비교하지 않아도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김봉수는 정말 평범  자체이다. 어딘가 어수룩하지만 누구보다 착실하고 성실하게 하루를 살아내는 33살의 은행원, 연애가 하고 싶은.. 아니, 결혼이 하고 싶은.. 아니, 그저 용건 없이도 전화를   있는 자신의 사람이 필요한 심심하고 외로운 33살의 노총각, 김봉수.

 



봉수는 외적인 모습도 평범하기 그지없다. 어벙한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 하얀색 반팔 와이셔츠와 넥타이, 정장 바지, 검은 구두, 서류 가방.. 이렇게 나열해 놓으니 정말  평범해서 지루하기 짝이 없을 정도다. 왠지 어제  지하철에서 마주친  같기도 하고.. 이쯤 되니 오히려 봉수라는 이름이 튀는  같은 느낌. 하지만 나는  평범함이 좋았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그의 전작에서는   없던 평범하기 그지없는 평범함이 오히려 신선함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리고   재밌어야만 좋은  아니니까. 내용은 별로여도 장면이 좋으면, 캐릭터가 살아있으면  영화는 나름대로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 테니 말이다. 아니면  당시 팬심의 마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배우의 영화를 당연히 좋아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주술을 걸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16살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고 나중에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엔 16살의 감상평 하고는 확실히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헐 뭐야, 이 영화 왜 이렇게 재밌어?’ 당황스러웠다. 저 대사.. 재밌다고 느낀 적 없었는데, 봉수의 대사에 웃음이 터지는 나.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왜 굳이 저런 진상 짓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던 원주의 행동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나. 확실히 달라진 나의 감상 태도가 당황스러웠지만, 영화 안에만 존재했던 봉수와 원주가 살아 숨 쉬는듯한 기분은 이 영화를 처음 봤던 16살 때엔 느낄 수 없는 즐거운 새로움이었다. 그렇지만 그 새로움은 사실 전혀 새로울 게 없는 것이기도 했다. 왜냐면 살다 보니 나도 봉수처럼 굴 때가 있었고, 누군가를 좋아할 땐 원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영화에서 보여주는 인물들의 모습은  인물들만의 고유한 것이 아닌 어느 시절, 어떤 순간의  모습이었다.  나뿐만이 아닌  주변에서 자주   있는 그런 모습들이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수줍어하고, 찌질해지고, 귀여워지기도 하고, 느끼해지기도 하고, 당당해지기도 하는.. 소년 같기도 하고 소녀 같아지는. , 나는 이런 평범함을 좋아하는구나. 독특한 취향을 갖고 있는 유별난 사람인  알았지만,  결국 이런 잔잔하고 일상적인 '진짜 같은 이야기'를 담은 것에  끌려하는 평범한 사람인 것이다. (물론 진짜 같다는 것도 진짜 진짜는 아니란 뜻이지만.. 그래도 진짜인척 하는 가짜랑은 결이 다르지.)

 



화려하고, 매혹적이고, 자극적이고, 아드레날린이 팡팡 터지는 그런 것들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과 사랑들은 언제부터인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쩔 땐 부럽기도 하고 꿈꾸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어쩌다 일뿐이다. 그런 것들은 진짜의 모습이 하나도 없잖아. 너는 저런 게 정말 진짜라고 생각해? 전부 가짜. 그래서 금방이라도 사라지고 없어질 것 같은 이야기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는 평범하고 또 너무 평범하지만 그 어떤 이야기보다 진짜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 나는 이런 평범함이 너무 좋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이 평범함만이 가질 수 있는 편안함이 좋다. 봉수와 태란의 이야기보다 봉수와 원주의 이야기가 더 안정적인 것도 결국은 이 평범함 안에 가지고 있는 편안함 덕분일 거라고 생각한다. (왠지 봉수는 원주보단 태란을 더 좋아했을 것 같지만, 원래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크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랑은 잘 되지가 않으니까.)

 



평범하고 편안한 사람, 평범하고 편안한 사랑. 그래서 꾸밀 것 없이 아니, 꾸미지 않아도 충분한 평범하고 편안한 이야기. 그래, 나는 이런 평범함을 사랑하는 거야. 처음 봤을 때 좋다고 느꼈던 표면적인 평범함에서 시간이 지나 좋다고 느껴지는 이면적인 평범함까지. 평범함에서 다른 평범함으로.

 



이처럼 고춧가루 한 톨도 들어가지 않은 것 같은 슴슴한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지루하고 지겨운 러닝타임이 되겠지만 반대로 이런 담백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나처럼 두 시간을 깔깔거리면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거 다 떠나서 이 영화가 주는 풋풋함은 어쩔 도리가 없다. 2000년 초반의 한국 멜로 영화들은 어쩜 이렇게 풋풋하고 아름다운지. 아마 이 영화는 그 시대만이 가지고 있는 풍경이 가득 담겨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아름다워질 거라고 생각한다. 또 배우들 앳된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고. 여름 장마철은 벌써 가버렸지만 여름이 다 가기 전에, 혹은 비 오는 날 꺼내보면 좋겠다. 그리고 매해 여름 장마철마다 꺼내보는 영화가 되길 개인적으로 바란다.

 



그리고 사실 사랑은 특별한 게 아닌 평범함으로 시작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평범한 사람들끼리 만나, 남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조금 다른 평범함을 발견하는 일. 가령 봉수가 웃을 때 왼쪽 뺨에 살짝 보이는 보조개 같은 것을 발견하는 원주처럼. 나이가 들어도 웃는 게 소녀같이 예쁠 것 같은 원주를 발견한 봉수처럼. 그렇게 평범하지만 서로에게는 더없이 특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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