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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Feb 01. 2022

봄을 기다리는 나목

당신이 만일 승낙하여서 나와 결혼해주신다면 육신적으로는 고생이 될 겁니다. 
그러나 나는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많습니다.
둘이서 협력해서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
나는 이제까지 내가 아내로 맞을 결혼대상의 여성은 
당신 같이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나는 당신을 꼭 나의 배필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내에게 보낸 친필 프러포즈


 몇 십억에 작품이 경매되는 화가, 박완서의 자전적인 소설에서 박완서가 미군 PX에서 일하다 알게 되었다고 언급한 화가(그도 미군 PX에서 돈벌이로 그림 그리는 일을 했다) , 돈이 없어서 담배 속지나 작은 종이 쪼가리 등에 그림을 그렸던 화가, 한국적인 정서와 인물을 담아낸 화가. 내가 아는 박수근이었다.


 몇 주전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나가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박수근의 <봄을 기다리는 나목>전을 보았다. 그가 나처럼 추위를 엄청나게 탔다는 사실, 그래서 늘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겨울을 보냈다는 사실을 새로 알았다. 그는 나를 몰라도 나는 그를 잘(?!) 알고 있으니 이런 작은 공통점에도 박수근 화가가 오랜 지음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박수근이 아내에게 보냈던 친필 프러포즈 글에는 가난한 박수근의 담대함과 기백, 로맨티스트적인 면모가 보여 나 혼자 박수근에게 또 한 번 반하며 인간 박수근, 화가 박수근, 아빠 박수근의 모습 등을 다채롭게 감상했다.


잘 몰랐던 박수근의 그림들


 전시회의 제목에 들어가는 '나목'은 박완서 소설인 <나목>과도 연관된다. 벌거벗을 나, 나무 목이 합쳐진 나목(裸木)은 말 그대로 벌거벗은 나무, 곧 겨울나무를 가리킨다. 고등학생 때 읽은 소설이라 열심히 본 기억만 남아 있는데 이번 전시회에서 반갑게도 박완서 작가의 <나목> 한 구절도 만날 수 있었다. 벽면 가득 소설 <나목>의 구절들이 적혀 있었다. 



  

시간이 꽤 흘렀건만 지금도 종종 전시회 제목을 떠올린다.


 <봄을 기다리는 나목>에서 봄과 나목은 지시적인 의미인 걸까. 

  '겨울'이 담고 있는 메타포는 그의 삶을, 그가 숨쉬었던 시대를, 그 모든 것을 아울러야 더 또렷해지지 않을까.

'나목'은 그의 삶, 아이를 업고 고되게 살아가는 어머니들, 행상들, 길에 쭈그려 앉은 노인 등 당대의 군상을 떠올리게 하지 않나.

  

 박수근에게 그만의 겨울이 있었듯이 우리 모두에게도 우리만의 겨울이 있다. 그리고 간절히 바라는 '봄'도 있다. 남쪽에서부터 꽃이 피는 속도를 재보면 아기가 걷는 속도와 유사하단다. 어느 시인이 읊었던 것처럼


봄은 아장아장 오는 것이다. 


 

아장아장, 느린 걸음이어도 봄은 반드시 온다. 그리고 분명히 겨울은 떠나간다. 


시인 정지용은 일제강점기의 혹독한 현실을 인동차(忍冬茶)를 마시며 겨울을 보내는 노인의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겨울을 이겨내는 차, 인동차 한 잔을 음미하다 보면 아장아장 걸어온 봄이 어느새 옆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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