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하 May 28. 2024

아이들에게 죽음을 말할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어

사후세계에 대한 관점

아이들에게 죽음을 말할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어

모퉁이를 돌자 장례식장이 나왔다.

“여기가 어디예요?”

4살 첫째가 물었다.      

외할머니 생신이라 할머니댁에 간다고 해놓고, 차로 1시간 남짓 달려 난생처음인 곳에 와 있으니 그의 질문은 당연했다.      

“사람이 죽으면 안녕히 가시라고 모여서 인사하는 곳이야.”

‘죽으면’이란 구절을 작은 목소리로 재빨리 말하고는 아이를 슬쩍 보았다. 잠에서 깬 그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질문이 이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날은 엄마의 생신이자 고모부의 입관일이었다. 고모부가 갑작스럽게 임종하시며 엄마의 음력생일과 장례일정이 그렇게 겹쳐졌다. 장례식장으로 갈 채비를 하면서도 나는, 아이가 장례나 죽음에 대해 질문하면 어떻게 하지 하며 불안했다. 요즘 첫째는 내가 말하는 모든 문장에 ‘왜’를 붙이는 때라 질문공세가 이어질 게 뻔했다. 정답 없는 답안지를 준비하기가 녹록지 않았다. 대충이나마 끄적여놓은 메모도 없이, 질문공세를 받아낼 처지에 놓인 미래의 내가 한숨을 쉬었다.     

 

차에서 내려 빈소로 향하다 문득, 친척들이 잔뜩 모인 자리에서 아이가 깔깔대며 장난을 칠까 걱정이 됐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잘 가시라고 인사드리러 온 자리니까 장난치면 안 돼.”

문장 말미에 힘을 주었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밑도 끝도 없이 “장난치면 안 돼요.”라고 말하는 것으로 들렸을 것이다. 아이에게 미안했지만 당장의 단도리를 위해, 장난치면 안 된다고 반복해 말하고는 함께 빈소로 들어갔다. 검은 옷을 입고 눈에 눈물이 그득한 사람들을 보자 아이의 장난끼 도는 얼굴에 겁먹은 표정이 서렸다.  아빠에게 안겨 떨어지지 않는 아이를 뒤로 하고 나만 고인에게 국화를 건넸다.


밥이 차려지고 아이는 좋아하는 수박을 몇 개 먹고 나서야 평소와 같은 표정을 되찾았다. 그는 긴장이 풀렸는지 난데없이 무당벌레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하루 전 할아버지와 곤충채집통에 넣은 무당벌레를 기어이 차에 들고 타더니, 이제야 생각난 모양이었다.      

“진하야, 무당벌레 지금 차 안에 있어. 우리 이따가 풀숲에 놓아주자. 그렇게 차에 두고 오면 무당벌레 죽어.”

“지렁이처럼?”

“응, 지렁이처럼.”

“이제 그럼 꼬물꼬물 못 움직여?”

“응, 차에 계속 두면 죽어서 못 움직여.”   


죽는다는 말에 아이는 며칠 전에 집으로 오다가 만난 지렁이가 떠올랐나 보다. 매미와 개미, 애벌레를 좋아하는 첫째에게 비 오는 날 길에서 만나는 지렁이는 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며칠 전 햇빛이 쨍쨍 내려쬐는 날 보도블록 위에서 본 지렁이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한참을 바라보다 지렁이가 왜 움직이지 않냐고 묻는 아이에게 ‘지렁이가 죽었다’고 말해주었다. 아이는 그 후로도 개미들이 엉겨 붙은 지렁이를 한참 동안 보았다.  

    

아이에게 죽음은 움직이지 않는 지렁이를 떠올리게 하는 일이었다. '고모부가 죽었다'라고 표현하면 아이는 대번에 지렁이를 떠올릴 것 같았다. 부동의 상태를 부각해 아이에게 죽음을 모습을 그려보게 할 순 있었지만, 영 마땅치 않았다. 죽음이 그렇지만은 않기에 아이에게 원형의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는 말은 늘 신경 쓰였다. 아직 4살인 아이는 오늘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죽음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에게 적합한 어휘를 찾아 죽음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웠다. 그것은 나의 죽음관과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진: Unsplash의 Anca Gabriela Zosin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외할머니댁으로 옮겨 급하게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는, 다시 서울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머릿속에 잊고 지냈던 정현채 교수님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모르지만 내과를 전공한 후 호스피스 완화의료 전문의가 되며 죽음을 자주 목도하게 된 나는, 그의 책과 칼럼을 아껴가며 보았다.      


그의 책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가>를 다시 집어 들었다. 나는 그가 철저히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입각한 과학교육을 받은 의사,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부정하도록 교육받은 사람이라는 것에 마음이 놓였다. 그는 소화기내과 의사이면서 방광암 환자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새로운 사실에 열려 있는 마음을 갖되 무비판적으로 아무것이나 덥석 믿지는 않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자세를 견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면에서 그는 사후세계관에 대해 누구보다 편협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전하는 새로운 이야기가 있을까 하여 온라인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했다. 반갑게도 올해 5월에 게재된 한 기사에서 한 온라인 공청회에 패널로 참석한 정현채 교수님을 다시 만났다. 그 공청회는 어린이를 ‘진짜 삶의 주인공’으로 성장시키자라는 기치를 내세워 영국의 ‘옥스퍼스 휴먼즈’와 한국의 ‘그데함’이 공동주최한 것이었다. 기사는 “초등시기 어린이의 80%가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지만 아이들은 애도, 사별에서 소외된다. 아이들도 애도를 통해 성장하므로 남겨진 삶을 위해 ‘죽음교육’이 시급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정현채 교수님의 발언 내용도 아래와 같이 요약되어 있었다.      


 “아이들도 제대로 된 사별과 애도가 필요한데 얘기조차 해주지 않는 데다 특히 부모님의 죽음을 겪은 아이들에게 ‘착한 분이라서 하느님이 먼저 데려갔다’‘멀리 여행을 떠났다’는 식으로 얘기하면 ‘나도 착한데 나는 왜 안 데려가지? 등의 의문으로 아이들은 큰 혼란을 겪는다”, “성교육도 ’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가 아니라 정확하게 사실을 얘기해줘야 하듯이 죽음도 둘러대지 않고 정확한 실체를 얘기해 주는 게 중요하다.”


사진: Unsplash의Caleb Woods


기사를 보며 전공의 시절, 30대 위암 말기였던 여성환자를 임종방으로 옮겼던 그날이 떠올랐다. 임종선언을 하고 이어서 할 일들을 생각하고 있는데, 병실로 남자 어린이 두 명이 들어왔다.   


"저희 아이들이에요. 그래도 엄마를 보여줘야 될 것 같아서요."     


환자의 남편이 아이들과 함께 들어오며 말했다. 아이들은 내내 엄마를 만나지 못하다가 그녀가 임종한 날에서야 병원으로 들어와 엄마를 볼 수 있었다. 죽어가는 엄마가 있는 병원은 어른들이 정한 출입금지구역이었다. 아이들은 그런 곳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되며 죽어가는 사람을 봐서는 안된다는 것 또한 어른들의 생각이었다. 병원을 출입금지구역으로 정하는 것은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그들에게 죽음을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한 어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었다. 내가 그들을 엄마와 만나게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자리를 피해 방을 나왔다.


'그때 그 아이들은 엄마의 죽음에 어떤 설명을 들었을까?'     


그 뒤로도 나는 수많은 말기암 환자를 만나면서 그들의 편안한 임종에만 몰두했을 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지 않았다. 전문의가 되어 함께 근무했던 호스피스 간호사 P가 임종방으로 환자를 옮긴 후, 임종이 임박한 때 그들에게 해 주는 말이 그저 멋지다고만 생각했다.      

“빛이 보이거든 그 빛을 따라가세요.”

기독교 신자였던 간호사 P는 자신의 사후세계관을 환자나 보호자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임종이 임박한 환자들에게 그 한마디를 전할 뿐이었다. 나도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녀의 말은 자신만의 사후세계관이 없다면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환자들을 만나는 내내,  말기암 부모를 둔 어린 자녀들에게 어떻게 죽음을 이야기해야 할 것인가는 늘 숙제였다. 젊은 말기암 환자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도 그 부분이었다. 그것은 완화의료팀 의사로 일하면서 가장 피하고 싶었던 질문이기도 했다.      


아이가 장례식장에 따라다닐 수 있는 나이가 되어 그 질문과 다시 조우했다. 나는 그 질문을 너무 오래 묵혔다. 첫째가 그렇게 클 때까지. ‘우리의 시작과 끝’에 대한 정답이 아니라, 당신의 생각을 내어 놓으라는 듯 반짝이는 그의 눈을 피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간호사 P가 절실했다. 그녀였다면 자신의 생각을 기반으로 아이가 이해할만한 어휘를 골라 이야기해주지 않았을까.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게 될 아이들이 상실 속을 애도하며 통과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다루는 어른의 말이 필요하다. 정현채 교수님의 말처럼 나 역시 그것이 가능한 모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사후세계관은 적어도 우리 아이들에게는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이제야 문장을 하나 준비두었다.

"죽음의 실체는 소멸이 아니고 옮겨감"이다.

이 문장이 필요해지면 그것을 말하고는, 나의 관점을 강요하진 않을 것이다. 아이들을 포함하여 그 누구에게도 특정 사후세계관을 강요할 순 없으니 말이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사후세계를 구축해나가지 전까지, 나는 그들이 슬프더라도 두렵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슬픔을 통과하며 단단히 자란 아이들이 자신들이 정립한 사후세계관으로 말미암아, 이 생이 '끝내주게 감사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대문사진: Unsplash의 Caroline Hernandez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