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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 Aug 17. 2024

난생처음 소설 쓰기

입문자에게 소설을 쓰게 만든 브런치의  힘

브런치의 놀라운 힘을 곳곳에서 목격합니다. 저도 그 수혜자인 것 같아 작성하고 발행하지 않은 7월의 기록을 남깁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가 소설을 쓰겠다, 자리를 지키고 앉게 된 계기가 브런치를 통해서 만난 한 '감독님의 말'이었더라고요. 그 전까지 제게 소설은 '내가 어떻게'나 '언젠가'의 영역이었어요.

쫄보다보니 내뱉은 말이 허언이 될까봐 쓰겠다는 말도 못하고 자판을 두드렸고, 어쨌든 난생처음 공백포함 10만자를 썼습니다. 출간소식같은 멋진 이벤트는 아니지만 '난생처음'의 순간속에 스며듬을 자축합니다! 스스로에게 감탄해 주었음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기도 하고요.

생생한 스승이었던 환자와 보호자들, 동료들을 소설 속 한 공간에 모은 것은, 저에겐 더없이 소중한 작업이었습니다. (현실속에서는 불가능했던 일들을 소설속에서 해내면서 참 많이 눈물이 나더라고요. 또르륵...)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종종 브런치팀에서 오는, 글 발행은 근육과 같아서라는 메시지를 보면서 얼마나 뜨끔하던지요), 제 글을 읽어주시는 소중한 분들을 만나니 지속할 용기가 났습니다. '한번 써보세요'라고 말씀해주신 분에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으니 안 쓸 수가 없더라고요.


역시나 글을 쓰는 일은  순간적인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자판을 오래 두드리고 나니, 꾸준히 글을 쓰시고 계신 분들을 보는 제 눈빛이 달라짐을 느낍니다. 정말 멋지십니다.


쓰다보니 고맙다는 말이 길게 늘어졌네요 :-)

감사드립니다!






2024년 7월.


요즘 글을 쓰는 내 모습은 바깥날씨와 비슷하다. 해 같은 얼굴을 하다가도, 구름이 잔뜩 낀 표정을 짓고는 갑자기 콸콸 눈물을 쏟는다. 내 글쓰기는 우기를 맞았고 나는 우산 없이 빗속을 통과하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그곳을 향해 걸어간다. 난데없이 소설을 쓰고 있는 나는 빗속에 우두커니 서 있지만 눈빛에는 호기심이 어렸다. 나를 본 누군가는 당장 우산을 건네려들다 곧 가만 두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일 것이다. 그 눈빛 덕분에 말이다.


내 소설 쓰기는 한 감독님이 툭 던진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플랫폼 브런치에서 그녀의 글을 재미있게 보고 있었고, 그녀 역시 내 글을 읽었던 터였다. 그러다 한 북토크에서 우리는 만났다. 말 그대로 우연히 말이다. 그곳에서 연락처를 주고받은 나와 그녀는 2주 후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말기암 환자를 임종방으로 옮기고 환자들의 집을 방문했던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나는 그것을 그녀가 내게 건네는 다채로운 질문들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수박주스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짬뽕집으로 옮겨 밥을 먹으면서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비가 억수같이 오던 날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 악취미를 고백했다. 종종 나는 ‘내가 현재 겪을 수 있는 가장 처절한 고난’이 무엇일지 질문하고, 내가 그것을 어디까지 긍정할 수 있는지 묻는다고. 그래서 때로 고통스러워한다고.

아이를 낳고 나니 ‘자녀가 나보다 먼저 이생을 떠나는 것’이 가장 큰 아픔일 것 같더라고요. 저는 그런 부모들을 생각보다 많이 만났습니다. 팔순 노인이 육십대인 아들에게, 아가야 잘 가거라.라고 말하던 장면은 아직 잊히지가 않아요.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울까 봐 생각을 멈추기로 했습니다.”


헤어질 때쯤 그녀가 질문했다.

“앞으로 무얼 하고 싶나요?”
“소설을 써보고 싶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내 입에서 나온 말에 스스로가 놀랐다. 말을 하면서 알았다. 소설을 쓰고 싶었구나.
아마도 꾹꾹 눌러 봉인된 질문들이 기어코 머리를 들었나 보다. 뭐라도 써야지, 이렇게 눌러만 놓아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답을 찾을 수 없다고.

내 말에 그녀는 놀라운 대답을 했다.


“작가님, 쓰실 수 있을 거예요.“

사진: Unsplash의Bookblock


그 말에 힘을 얻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절대적 사실이다. 그렇게 나는 무얼 써나가야 할지 모른 채, 질문들만으로 이루어진 상자를 안고 일단 시작했다. 아이를 먼저 보낼 운명에 처한 엄마는 어떻게 살아갈까란 질문을 다시 불러들였다.


질문은 그래도, 내 글 속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서사는 비통하지만은 않다. 이야기를 통해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 수시로, 무시로 등장하여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나는 길을 걷다가 혹은 아이와 놀다가, 그들의 대화가 떠올라 멍해지기도 하고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한다. 서로가 미소 지을 수 있기를 바라며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 유머와 해학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주인공 ‘이연’은 그 속에서 그렇게 엄마가 되어간다.

그녀는 내가 바랬던 의사가 된다. 홀로 죽어가는 이를 자신의 병원으로 데려와 그 옆을 지키고,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크게 피어나는 흰 꽃이 된다. 내가 과거 하지 못해 슬펐던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그녀 덕분에 위안을 얻는다.   


그녀는 또한 현실의 나를 움직이게 한다. 덮으려고 했던 소크라테스의 <파이돈>을 다시 펼치게 하고, 플라톤을 통해 그가 말하는 ‘영혼’에 대해 다시 살피게 한다. 얼마 전에는 대전까지 <호스피스, 완화의료 학회>에도 다녀왔다. 소설을 쓰기 전까지 나는 올해 학회에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개최 장소도 왕복 5시간 거리여서 그곳까지 갈 엄두를 내지 않았었다. 그런데 웬걸. 주인공 이연이 호스피스 분야에 전문가인 이상 다녀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론적으로는 여러모로 다녀오길 잘했다!


소설을 쓰며 삶을 꾸려나가는 내 모습이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나에게는 ‘마음 챙김’과 함께, 이런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고수했던 생각이 전복되어 혼란스러우면서도 그것을 통과하며 울고 웃는 시간들이 말이다.  


이야기를 끝까지 이어 나갈 수 있을지 걱정된다. 다만 이 ‘소설 쓰기’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호기심이 더 크기에, 근근이 글을 이어간다. 그 근근함 덕분에 내가 챙겨진다. 감사한 어부지리다.

우기가 끝날 때 쯤 비로 흐린 하늘 속 숨어있는 무지개에 가 닿으려나? 모르겠다.



대문사진:Unsplash의 edu-lau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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