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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 Aug 02. 2024

곤충채집 유감

    

아가가 누웠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을 때, 새벽 6시임을 감지한다. 해 뜨는 시간과 연동된 아가의 생체리듬을 존중한다. 더 이상 눕지 않을 그를 들어 안아 유모차를 태운다. 아가는 손가락 두 마디만 하게 자른 바게트빵을 오른손에 그러쥐고는 끝까지 사수하겠다는 표정이다. 이른 아침, 결연한 우리는 또 빵을 사러 간다. 새벽을 여는 빵집이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아파트 단지 내를 가로질러 가다 보면 매미소리가 폭포수처럼 떨어진다. 득음을, 실제로는 성공적인 짝짓기를 바라는 그들은 절절한 명창이다. 아가에게, 매미의 계절이다 하려는데, 아니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 절기에는 못 미칠 날들, 매미의 14일이다.      


빵집으로 가는 길, 그들 중 몇은 이미 대지를 침대 삼아 대자로 누웠다. 움직이지 않는다. 수년간 땅속에서의 생활이 즐거웠기를, 바깥으로 나왔던 기간도 평온했기를, 더해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기를 바라는 눈길을 보낸다. 관심 없었던 매미의 생활사를, 4살 첫째와 함께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그제야 여름에 우는 존재가 그들임을 알았기에 조금 미안한 마음을 담는다.  

     

그날 오후 첫째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갔을 때, 매미소리에 발자국 소리를 숨긴 이가 살금살금 참나무로 다가간다. 첫째다. 그 뒤를 잠자리눈 선글라스를 낀 시아버님이 뒤따른다. 손에는 곤충채집통을 든 채로. 둘째를 태운 유모차를 밀다 말고 먼발치에서 바라보는데, 겟차 그새 한 마리를 잡았다. 매미는 곤충채집통 안에서 어쩔 줄 몰라 이리저리 부딪히더니, 자지러지다 혼절한다. 첫째가 곤충채집통 툭 치자 매미는 다시 울며 날갯짓을 하는데, 통 안에서 부딪히는 몸둥아리를 느끼고는 공황에 빠진 듯하다. 그 모습을 보며 웃는 첫째를 나는 울먹이며 바라본다. 첫째도 남편도 시아버지도 눈치채지 못한다. 내 표정이 왜 그런지. 우리에겐 맴맴맴으로 들리는 소리는 아마, 이 자식들아 나를 놓아줘. 나 너희들이 그러고도 사람이냐. 같은 말이 아니었을지.   

   

“자 이제 놓아주자.” 나는 목소리를 떨리지 않게 가다듬고 위엄을 담아 말하려 노력한다.      

첫째가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날려보내겠다며 매미를 집어 옷에 붙인다. 그가 매미를 집는 엄지와 검지손가락 힘을 잘 조절하는지, 날개가 아니라 몸통을 잡는지 확인하느라 무릎 뜬 눈이 아프다.

놓아주자는 어른들의 말에 아이는, 매미를 하늘로 날려주겠다며 휙 던진다. 땅에 곤두박질치는 매미를 보고 내 얼굴은 붉그락푸르락해진다. 처음부터 매미 잡기를 하지 말라고 하지 못한 자신을 향한 불길이, 가장 거세게 인다. 그 불은 나중에 해결하기로 하고 아이에게 한번 더 말한다. 내 목소리로 상황을 감지한 남편이 적극적으로 다가가 매미몸통을 잡아 나무에 올린다. 매미는 움직이지 않는다.

“매미가 왜 움직이지 않아요?”

첫째의 말에 힘들어서 잠시 쉬고 있나 보다.라고 말하고는, 실제로도 그러기를 바란다.

     

꿈과 희망의 디즈니풍 매미


다음 날 남편과 아이를 데리러 가는 차 안에서 가족회의가 열린다.

나는 곤충을 왜 잡아서 관찰해야 하는가? 왜 꼭 만져봐야 하는가?로 질문을 시작한다. 곤충채집 전면금지! 를 외치기 전 변론을 한번 들어보겠다는 심정이다. 실제로 곤충을 채집하는 일이 왜 필요한지 알고 싶기도 하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며 매미나 딱정벌레, 사마귀 같은 곤충들을 잡았던 남편은, 채집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항변한다. 나는 그런 태도는 약한 것들을 함부로 해도 된다고 은연중 길러주는 것이 아니냐. 고 말하려 입술을 달그막거리다 만다. 머릿속에 할 말들이 자리를 못 잡고 맴맴 거린다.다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고는 첫 번째 회의는 그렇게 끝이 난다.

      

다음회의를 도모하여 나를 돌아본다. 나는 자연의 대변인이라던가, 온전한 지구지킴이는 아니다. 비가 온 다음 날 보도블록으로 마실 나온 지렁이를 나뭇가지로 떠, 흙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종종 할 뿐이다. 그것도 바쁘지 않을 때, 그들이 보일 때만이지만. 보통 그러면서 제대로 돌아가지도 못할 거면서 왜 여기까지 나왔느냐고 지렁이를 타박한다. 가끔은 여기에 왜 보도블록이 있냐고 애꿎은 것들을 탓하기도 한다. 내가 곤충이나 절지동물 같은 자연의 일부를 바라보는 마음은 그 정도이다. 그저 그들이 제 명을 살다가 가면 좋겠다는 바람. 날개가 찢기거나 다리를 떼이지 말고.      


이런 마음은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향한 바람과 비슷할 것이다. 바라는 정도를 물감으로 찍어내 농도나 채도를 확인할 수 있다면, 매미를 바라보는 마음이나 나를 바라보는 마음이 올리브그린정도로 비슷할 것이다. 그저 그 정도이다. 누군가 그러면 매미 잡기를 왜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실은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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