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좀 전에도 커피를 후루룩 마시려고 머그컵에 입을 대다 ‘앗. 뜨거워.’라는 생각이 들어서야 뜨거운 커피를 내렸다는 걸 알아차리고, 얼른 글을 쓰려 마우스를 광적으로 클릭했지만, 감사와 사랑의 무브먼트를 하며 내 몸이 감사의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명상을 집중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욕심은 늘 있었다. 학문적 성과를 내려고 무리와 부단함을 오갔던 내가, 수년 전 처음 명상을 한 이후부터 유독 잘 지키는 것은 ‘애쓰지 않는 것’이다. 명상수행을 하는 데엔 좀 더 욕심을 내어 스케줄을 잡아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자주 일었지만 공평하게 하기로 했다. 명상도 다른 일도 무리하지 않기. 그러다 한 달 전, 종로 고싱가의 숲에서 <3일 집중수행>이 열린다는 것을 것을 문자로 받았을 때, 감당가능한 스케줄임을 확인하고는 물 흐르듯 신청했다. 참여비용을 지불할 돈이 있다는 것과, 내가 이것에 참여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들 중, 인식가능한 사람들에게 더없이 커진 감사를 표하면서.
수행을 기다리는 한 달 동안, 난데없이 소설을 쓰며 머리가 뜨끈뜨근해질 지경이었다. 머릿속에서 내가 주인공에게 짊어지게 한 고난이 내 것처럼 살아 움직였고, 주인공은 내게 이게 개연성이 있냐고 자주 반문했다. 그를 창조한 나는 오히려 그에게 물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원인과 결과가 뚜렷하더냐고. 우리가 그걸 다 알 수 있느냐고. 그는 답이 없었다. 그와 아웅다웅하느라 수행일정이 다가오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받은 안내문자에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 없이 나는 고싱가의 숲, 그 한가운데 던져지듯 앉았다.
나는 이번 집중수행에 기대하는 것이 없었다. '기대'라는 것에도 그것을 할 만큼의 시간을 내어주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그저 몸을 덩그러니 하여 앉았고 그렇게 집중수행은 시작되었다. 3일 동안 묵언하며 안내자들을 따랐다. 적당히 스케줄을 소화했다. 이렇게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실은 귀찮았다. 그럼에도 다른 이들에 대한 관심만은 살아서 관찰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묵언해야 했으므로 말에 쓰던 에너지를 얻은 내 눈은 평소보다 더, 타인의 모습과 행동을 살폈다. 저 사람은 저럴 거야, 이 사람은 이럴 것 같은데, 저들의 관계는 이렇지 않을까. 머릿속이 분주했다. 그런 나를 좌종소리가 붙들었다. 커다란 항아리의 허리를 반쯤 잘라놓은 것 같이 생긴 좌종은, 치는 사람의 마음과 힘을 그대로 받아 제 몸을 울렸다. 그 울림으로 명상시작을 늘 알려주어 분산된 마음을 제 자리로 가져올 수 있었다.
감사와 사랑을 담은 몸짓과 소리를 내어하는 명상은 새로웠다. 재밌기도 했다. 머릿속에서 명상은 엄숙하고 근엄해야 한다는 생각이 일었지만 요즘의 나는 안다. 그것은 '내가 만들어낸' 명상의 모습이라는 것을. 내 삶을 나는 자주 그렇게 제한한다는 것도. 그 허상 같은 것을 지워내려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분주히 일어나는 생각을 관찰하듯 바라보며 몸을 움직이고 눈을 감고 소리를 냈다. 분주함은 넉넉히 배정된 쉬는 시간과, 따뜻한 차로 천천히 가져가는 손동작을 통해 잠잠해졌다. 그것들에 기대어 마음과 근육 어딘가가 부드러워지려나 했지만 딱히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3일의 명상일정은 그렇게 진행되어 갔다.
둘째 날도 첫날과 다르지 않았다. 명상하고 밥먹고,질문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둘째 날 좀 달랐던 것은 내 팔이었다. 질문시간이 되자, 내 팔이 손을 들어 질문을 하고 있었다! 이게 내가 그동안 고민했던 거야?라고, 생각은 스스로에게 반문하고 있었고 내 입은 말하고 있었다. 내 질문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랬다.
"제가 과거에 배웠던 MBSR 명상법이나 지금 하고 있는 이 명상이, 삶의 고통에 대응할 수 있습니까."
몇 달 전 어느 곳에서 들었던 말, “당신이 과거 배우고 해 왔던 명상들은 좋을 때만 좋을 뿐, 삶의 고통을 해결할 순 없습니다.”라는 그 말이 묵직이도 내 안에 있었나 보다. 종종 내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글로 적어내는 것이 과연 다 진실한지 헷갈릴 때가 있지만, 이번에 나는 내가 하는 말, 그 목소리가 무어라 하는지 듣고 싶어 멈추지 않았다.
명상 안내자들은 친절하고 충분히 이해가 되도록 답변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속에서는 꼬리를 물고 끝없이 질문이 일었다. 자식을 잃는 것 같은, 참척을 당한 사람들의 고통도 명상이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런 고통이 닥친 사람들에게 명상을 하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명상들은 결국 나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것 아닌가? 질문은 자기의 자리를 빼앗길 수 없다는 듯 끝없이 이어졌고, 나는 그때 안내자를 따라 소리명상을 하고 있었다. 머릿속 질문들은 회오리를 쳤고 강도가 세졌다. 바깥이 아닌 마음속으로 소리를 내는 차례가 되었고, 안내자의 음성에 따라 내 몸은 마음속으로 소리를 내려 배에 힘을 주었다. ‘읍’하고 배에 힘을 주었던 그때, 좌종소리가 거세진 듯했고 다리를 틀고 앉아있던 나는 무언가가 미는 힘에 밀려 뒤로 그대로 나자빠졌다. 토네이도 같던 생각들도 나자빠져 사라져 버렸다.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의사이고 과학자이며, 명상에서 그 어떤 신비로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실리주리자일 뿐이며, 카이스트명상과학 센터장인 미산스님이 개발한 이 명상법이, 얼마나 뇌과학과 심리학에 기반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어질 일은 벌어진다.
왜 내가 뒤로 넘어간 거지?라는 생각할 겨를 없이, 누가 물으면 졸다 자빠졌다고 말해야겠단 생각이 앞섰다.
소리명상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눈물과 함께 오른쪽 얼굴을 타고 내린 아이라이너의 검은색만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슬며시 말해주고 있었다. 거울을 보지 않았던 나는 어느 친절한 분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 얼굴을 하고 하루 종일 앉아있을 뻔했다.
남은 수행일정을 해내고, 마지막 날 오후쯤 묵언이 풀렸다. 참여자들 모두가 둥그렇게 둘러앉아 목소리로 마음을 나누었다. 집으로 돌아가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이런 시간을 이어갈지에 대한 안내로 집중수행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나는 나 자신에게 10분을 내어주었다. 내어준 시간 동안 나는 자신과 타인, 세상을 향해 감사와 사랑을 표현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보려고 한다. 그래도 된다는 용기가 드러났다. 감사와 사랑에 의심을 가졌던 지난 날 만큼 좀 더 힘을 내어서, 불현듯 닥칠 수 있는 나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에도 뒷걸음질 치지 않길 바라며 말이다. 과거의 나는 힘겨워하는 말기암 환자들을 보며 그들의 고통과 얼마나 멀어지고 싶었던지. 돕고 싶어 발을 동동 거리면서도 타인의 힘듦을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나는 나약했다. 지식으로 무장했던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 늘 답답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답답한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많이도 돌았다.
자기 몸으로 울 줄 아는 좌종은, 그런 나를 3일 동안 바라보며 안타까웠을 수도 있다. 그렇게나 이익을 바라면서도, 자신에게 무엇이 손해고 이익인지도 제대로 모르며, 질문이라 여기고 끈덕지게 잡고 있던 나의 에고를 말이다. 생각이 소용돌이치던 그때 나가자빠지며, 좌종소리가 날려버린 것 같다고 느낀것을 모른 척하진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감사와 사랑에게 내가 언제 당신들을 잊었었냐는 듯 미소를 지어야지,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좌종소리를 떠올리며 다시 발을 내딛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