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이민자가 되는 첫걸음
2016년 봄, 나는 32살의 나이에 9년 차 초등학교 교사였다. 20살 때부터 매년 1,2회씩 한 달 배낭여행을 다닌 여행자였고, 22살에 이집트에서 시작한 스킨스쿠버에 빠져 다이브 마스터까지 딴 10년 차 다이버였고, 자전거를 바리바리 싸들고 가 일본에서 기차와 자전거만 이용한 자전거 배낭여행을 하고 올 정도로 자전거에 빠져 운동선수 흡사한 허벅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십 대부터 사부작사부작 즐기던 10km 마라톤을 넘어서, 서른이 되면서 도전한 하프마라톤에서는 두 번이나 입상권 안에 들며, 함께 달리던 어르신들의 "조금만 체계적으로 연습하면 1위도 끄떡없겠다!"라는 칭찬도 들었다. 2014년쯤 발리에 일주일 간 서핑을 하러 갔는데 엄정화가 내 옆에서 파도를 잡겠다며 패들질을 하고 있었다.
매주 수요일마다 퇴근 후 인사동 문인 화실로 다시 출근 도장 찍는 생활 2년 정도를 하자, 문인화전에서 입선 정도는 할 실력이 되었다. 한글날이면 옥색 도포를 입고 광화문 광장 바닥에 화선지를 펼치고 화우들과 기예를 뽐내는 고전적인 기쁨을 만끽했다. 주로 떡을 간식으로 드시는 우리 화실의 화우님들은 평균 연령이 65세 정도 되었다.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그리고 우리 동네 북한산, 도봉산, 수많은 둘레길과 오름들을 걷고 또 걷고, 2015년에는 꿈에 그리던 네팔 안나푸르나를 걸었다. 그 외에도 우쿨렐레를 배웠고, 사진을 찍었고, 춤을 췄고, 그림을, 탁구를, 프랑스 자수, 수지침을..... 끝도 없는 호기심으로 미지의 영역을 탐구해나갔던 호시절이었다.
다시 2016년 봄으로 돌아와, 정확히 나는 결혼 후 공부하는 남편을 따라 미국에 온 지 한 달 차쯤 된 32살의 휴직자였다. 차가 한 대 뿐이던 그 시절, 걸어서 갈 수 있는 유일한 카페였던 스타벅스에서 남편이 없는 대낮의 덥고도 무료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주문할 때마다"파던?" "쏘리?"를 듣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집에서 아메리카노를 원어민 발음으로 무한 연습하고 난 뒤 드디어 버퍼링 없이 주문이 먹히자, 아무리 달달한 모카 라테나 마끼아또가 먹고 싶은 날이라도, 그냥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이 간단한 주문조차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낯부끄러워지는 그 상황을 또 마주치느니, 그냥 쓴 커피를 마시는 게 낫다 싶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어디 가서 말 못 한다는 말 들어본 적 없는 내가, 진행병으로 친구들의 핀잔을 종종 먹던 내가, 말하는 걸로 먹고살던 내가, 갑자기 말을 못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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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한국 면허가 미국 면허로 바로 전환이 되지만, 2016년 라테(?)는 필기-실기-기능으로 이어지는 정식 면허시험을 봐야지만 내가 살고 있는 애리조나 주의 면허를 딸 수 있었다. 차가 곧 발인 이곳에서 면허증은 신분증 이상의 중요성을 갖고 있었기에 시차가 적응되지 마자 면허시험을 준비했다. 시험에 강한(!) 한국인답게 문제은행식의 필기는 가볍게 통과, 그리고 운전경력 10년 차 베스트 드라이버답게 실기 따위는 가벼운 마음으로 도전했지만 두 번이나 낙방하고야 말았다. 첫 번째는 스탑 사인이 있는 곳에서 완전히 풀 스탑 하지 않고 슬금슬금 기어나갔다고, 두 번째는 자전거 도로가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너무 붙어갔다고, 이유도 각양각색이었다. 한국에선 그리 자신 있던 운전 조차도, 이 나라의 교통규칙에 익숙해질 때까지 긴장과 도전의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 이제는 카페에서 먹고 싶은 음료를 주문하고, 새로운 미국 교통법도 익숙해졌다. 몇 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따로 있었다.
" What do you do?"
내가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는지 질문이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럴 때마다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교사라고 하기에는 나는 지금 일하고 있지 않았고, 가정주부라고 하기에는 갓 입은 새로운 옷이 낯설었다. 제대로 된 배낭여행은 2015년이 마지막인데 여행 가라고 하기에도 무색했다. 미국에 오며 디지털대학으로 편입해하고 싶었던 공부를 짬짬이 하고 있었지만 온라인 대학이라 그런지 스스로 학생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사는 것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의 연속이었다. 어떤 날은 위에 말한 모든 일들을 다 구구절절 소개했고, 어떤 날은 그냥 놀고 있다고 했고, 어떤 날은 직장을 찾는 중이라는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익숙한 곳을 떠나고 나니, 한국에서는 나를 소개하는 일이 고민되는 일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새삼 다가왔다. 당시에는 종종 지루하다고 느끼며 불평하느라 미처 몰라봤던, 남들이 가는 길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타임라인 속에 살던 시절이 주었던 혜택이었다.
남편의 공부가 끝나고 돌아가기로 한 2년이 지났지만, 우린 돌아가기 않았다. 유학으로 시작한 타국 살이가 이민이 되었다. 원하는 목표를 위해 잠깐 남의 나라에 머무르는 유학생 신분일 때는 아무것도 포기할 필요가 없었다. 가족이 보고 싶고, 오랜 친구들과 온갖 쓸데없는 이야기를 공유하는 시간들이 그립고, 한창 열심히 빠져있던 인사동 화실에서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고, 해사하게 웃던 우리 반 아이들의 따스한 눈빛을 다시 마주치고 싶을 때가 종종, 아니 자주 있었지만, "2년만, 1년만 지나면 돼." 하는 마음으로 꾹 참아내었다. 때론 아무것도 포기할 것 없이 모두 잠시 잠깐 홀딩한 상태에서 2년간 안식년을 갖는다는 생각으로 설레고 감사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한국이 아니라 지금 머물고 있는 여전히 낯설고 어려운 이곳이 내가 꽤 오랫동안 살아갈 곳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웠던 것 같다. 받아들이는 순간, 내가 홀딩해놨던 많은 것들을 과거의 추억으로 놓아주는 수순을 밟아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에 온 첫 해에 만난 친구들은 유독 할머니들이 많았다. 내 어쭙잖은 영어를 인내심 있게 들어줄 만큼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가진 분들은 그분들 뿐이었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중에 두 분과는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 달에 한두 번은 만나는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갓 결혼한 새댁이자 백수로 잉여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영주권을 진행하느라 맘고생하던 시기, 여기서 뭘 할까 고민하며 이것저것 건드려보며 발버둥 치던 시기, 그리고 첫 아이를 임신한 순간부터 출산, 그리고 그 아이가 3살이 된 지금까지 모든 순간을 나누고 때론 멀찍이 지켜보기도, 때론 성큼 다가와 손 내밀어 주기도 한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중 한 분은 킴 할머니인데, 20대 초반에 미국 남자와 결혼하셔서 한국에 산 세월보다 미국에서 미국인으로 산 세월이 훨씬 긴 한국계 미국인이시다. 결혼한 뒤 미국에 건너와 두 아이를 낳고 기르고 십 년 이상을 가정주부로 지내시다가 막내가 학교에 간 뒤 공부를 시작해 지금까지 세무사로 일하고 계신다. 이민자로 살며 맞닥뜨리는 현실적인 어려움과 마음의 어려움이 뒤범벅이 될 때마다, 킴 할머니의 문자가 왔다. 내가 널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다 잘될 거라고. 한 번도 그렇게 직접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킴 할머니는 나에게서 사십 년 전의 자기 모습을 보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남편이 직장에 가고 나면 혼자 남은 새댁은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미국 드라마를 보며, 우체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정확히는 우체부가 가지고 오는 한국에서 온 편지를 기다렸다. 한국에 두고 온 가족과 친구와, 그리고 과거의 나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였을 그 편지들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영주권이 나오고 한참 뒤 킴 할머니와 단둘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영주권이 나온 것은 기쁜 일이지만, 이제 진짜 이곳에 자리 잡고 살게 된다면 영어도 서투르고, 한국에서의 학력, 경력 모두 쓸모없어진 지금 내가 새롭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라고 걱정이라고 털어놓았다. 한참을 듣던 킴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이민자로서 다른 나라에서 삶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뭔지 알아?”
“글쎄요. 그 나라 언어에 완벽해지는 거? 아니면 다시 학교로 가서 공부하는 거 아닐까요?”
나는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을 답이라고 내놓았다. 영어를 잘해야지, 미국에 있는 학교에 다시 가서 뭔가를 새롭게 배우는 게 영주권을 받은 뒤 이어질 스텝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따로 있어. 바로 한국에서의 내가 누구였는지 완전히 잊는 것.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
머릿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이민을 온 지 오 년, 십 년, 수십 년이 지났지만 내가 한국에서 어떤 대학을 나왔고, 어떤 일을 했고, 내가 얼마나 잘났었는지를 말하던 사람들 말이다. 정작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현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잘 얘기하지 않았다. 십 년 뒤에도 내가 한국에서 선생님이었고, 마라토너였고, 여행가였고 다이버였고 뭐 이런 사실을 떠벌이고 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하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직도 나의 영어는 완벽 발뒤꿈치에도 가보지 못했다. 전화영어를 할 일이 있으면 세 번쯤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고, 흑인 할아버지랑 얘기할 때는 그 특이한 악센트를 반도 이해 못 하며 그저 웃음으로 대화를 모면하고, 극장에서 자막 없는 미국 영화를 보며 남들이 웃는 포인트에서 황당하여있기 일쑤다.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수업을 몇 개 듣긴 했지만 아직 진짜 공부라 할만한 공부를 시작한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는 연습” 중이다. 이 글 첫머리에도 구구절절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늘어놓는 것을 보니 완벽하게 잊었다고 할 순 없지만, 나는 여전히 연습 중이다. 진짜 이민자로 첫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해야 하는,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 그것을 지금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