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민자가 되어버렸습니다만 #2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모두가 곧 고3이 될 것이란 긴장과 불안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때였다. 이번 여름방학에 뭐 할 거냐는 질문에 모두 새로운 학원, 과외 혹은 자율학습으로 부족한 영역을 따라잡고 고 3을 시작하겠다는 계획을 얘기했다.
"난 유럽여행 가."
무심히 툭 턴진 이 한마디에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지난 해 서울에서 전학 온 친구였다. 아직 비행기 한 번 안타본 그 시절의 내가 느꼈던 그 감정이 아직도 꽤나 생생히 기억나곤 한다. 예비 고3이, 금쪽같은 방학에 한달이나 유럽여행을..그것도 부모님없이 가다니. 그게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대략 이런 느낌이었다.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나는 그 친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부러웠다. 그리고 부모님께 속한 세계에서 떨어져 나오게 된 스무살이 되자마자 한 학기동안 열심히 알바로 돈을 모았고, 대학교 1학년 첫 여름방학에 생애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누군가에게는 늦었고, 누군가에는 빠를 수 있는 스무살이란 나이에 나는 간헐적 배낭여행자가 되었다. 한달간 의 방학은 다른 나라, 새로운 문화, 낯선 환경이 주는 설렘,역동감, 긴장감으로 인한 흥분을 선사하기에 너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운 좋게도 매년 한달간의 타국에서의 여행자라는 다른 자아로 살아가는 삶의 패턴은 직장인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방학이 있는 직업을 가진 덕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왜 그러게 매년 한달씩 한국을 두고 다른 나라로 가서 사냐고 물으면 늘 이렇게 답했다.
"그 한 달동안 만큼은 내가 가진 어떤 역할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나로서, 모든 것을 선택하면서 살 수 있잖아. 1년이 한달 정도는 그렇게 살아야지 그 힘으로 나머지 11개월을 딸로서, 직장인으로서, 친구로서, 애인으로서 수많은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살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실제로 그랬다. 여행자로 홀로 사는 한 달은 종종 몸이 고되고, 외롭고, 긴장되었지만 해야하는 일 따위는 없는 시공간 속에 사는 것은 충분히 그런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힘들면 쉬면 되고, 먹고 싶지 않으면 한두끼 정도는 그냥 스킵해도 아무렇지 않았고, 아무리 유명한 관광지가 코 앞에서 있어도 그냥 동네 까페에서 책이나 읽고 밍기적 거려도 아무도 한심하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12년간 여행자로 살고 나자, 나 정도면 어디 사하라 사막에 떨어뜨려놔도 잘먹고 잘살 수 있을 거라는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마음으로 이민자가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 살아본적은 없지만 그래도 여행자와 생활인의 중간 쯤을 줄타기하는 생활여행자로 살아온 경력으로 비춰봤을 때, 진짜 생활인으로 살아내는 것도 할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더구나 모두가 살고 싶다고, 부럽다고 하는 기회의 땅, 천혜의 자연을 가진 미국이 아닌가. 그렇게 여행자는 이민자가 되었다. 그것이 완벽히 다른 카테고리란 것을 꿈에도 모른채 말이다.
여행자의 눈에 비치는 세계는 그곳에 일상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진짜 세계를 아주 작은 열쇠구멍으로 보는 것과 같다. 티끌만한 점으로 반짝이는 별들을 수백광년 떨어진 지구에서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것과 같다. 아주 커다란 비눗방울 속에 들어가 두 발 모두를 땅에 붙이지 않고 둥둥 떠다니며 세상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여행자로서 비누방울 안에서 투명한 보호막 속에서 볼 때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자유로웠고, 다가가기 쉬워보였지만, 이민자가 된다는 것은 그 비눗방울을 내 손으로 터뜨리고 나와 한 발을 내 딛고, 양발 모두를 땅에 붙이는 것이자 현실로 안착하는 일이었다.
비눗방울 밖으로 나온지 3년이 되었다. 더 이상 여행자도, 여행자와 생활인의 중간 그 쯤어디도 아닌 완벽한 생활인으로 타국에서 살고 있는 3년 차 이민자의 삶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 매일 매일 완수해야만 하는 책임들을 투 두 리스트에서 지워가며, 일하고 돌아와 피곤한 와중에 좋아하는 책 몇 쪽을 펼쳤다가 잠들어버리기 일쑤이며, 늦잠이라도 잔 날은 한심한 나를 질책하곤 한다.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완벽한 생활인으로 살아내는 일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어디든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이민자로서 살아가는 나에게는 한국이 종종 사무치게 그립고, 가고싶은 "여행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만을 여행자라고 부른다.
낯선 땅에서 일상을 여행하며 살고 싶었지만, 돌아갈 곳이 없어진 나는 오늘도 그저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딛고 서려 안간힘 쓰는 그저 보통의 생활인으로 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