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 지지라는 인생의 안전망
엄마를 반년만에 만났다.
한국에 살 때도 엄마집에 자주 가는 편은 아니었는데 11,000km 떨어진 미국에 살게 된 뒤론 1년에 한 번 만나면 자주 만난 걸로 치고 살았다. 코로나 때 거의 3년을 만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반년만의 만남은 거의 지난주 보고 또 보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아빠를 떠나보냈던 그 집에 엄마는 여전히 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엄마는 4인용 식탁의 한 면을 부엌 벽에 붙여서 벽을 보며 식사를 하시곤 했다. 30년은 족히 넘은 나이 든 엄마집은 옛날집답게 부엌이 좁았다. 냉장고에 김치냉장고까지 부엌에 욱여넣다 보니 부엌에는 좁은 복도밖에 남지 않았고, 엄마는 식탁을 제대로 놓으면 다니기가 너무 불편하다고 했다.
그렇게 언제부터인가 엄마집 식탁은 누구도 마주 보고 먹을 수 없는 공간이 되었다.
그 식탁에 나란히 앉아, 밥을 먹고 어느 때처럼 과일을 후식으로 먹으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엄마는 나이가 드니 외롭다고 했다. 남편도 없고, 노후준비도 안되어있고, 가까이 사는 아들이 있어도 지식구 챙기느라 코빼기도 안 비치고, 딸 하나 있는 건 해외에 나가 버린 자기 처지가 안 됐다고 했다.
눈물짓는 엄마의 모습을 똑바로 마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다소의 안도감이 들었다. 식탁 덕분이다.
암에 걸려 돌아가시기 전, 내 기억 속의 아빠는 그 당시 보기 드문 남편이었다. 쉬는 날이면 밥을 해서 우리를 먹이고, 뭐든 뚝딱뚝딱 만드는 손재주에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전업주부인 엄마를 늘 존중했다. 심지어 키 178cm의 훤칠한 미남이기까지 했다.
엄마 곁을 오래오래 지켜주었으면 참 좋았으려 만, 하다못해 연금이라도 남겨주고 갔으면 좋을으련만, 공무원이었던 아빠가 근속 20년의 딱 2년을 못 채우고 돌아가셨다. 엄마에겐 연금이라는 절대 노후보장카드가 눈앞에서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연금 대신 퇴직금으로 받은 목돈을 외할아버지가 맡아서 불려주셨고, 친할아버지는 장남이었던 아빠 몫의 땅을 모두 미리 상속해 주었다. 지방이긴 하지만 빚 없는 아파트도 한 채 있었다. 그 덕에 엄마는 40대 중반부터 70이 거의 다 된 지금까지 생활전선에 뛰어든 적 없이 그럭저럭 주변의 도움과 절약의 미덕을 실천하며 살아왔다.
주 6일 일하느라, 두 아들 키우느라 바빠서 코빼기도 잘 안 비친다는 엄마의 아들, 우리 오빠는 대학을 중퇴하고 직업전문학교에 들어가 전기기술을 배웠다. 결혼 전까지 군대 때를 빼고는 단 한 번도 엄마와 함께 사는 집을 떠나지 않았다. 전기기술자가 된 다음부터는 엄마에게 생활비를 주며 함께 살았다. 덕분에 서른이 다 되도록 모아둔 돈도 없고, 결혼시장의 최악의 조건인 홀어머니 딱지까지 안고 있던 오빠는 결혼을 포기했다.
오빠가 결혼할 수 있었던 이유는 홀시어머니를 모시면서 함께 일궈나가도 괜찮다는 유니콘 같은 여자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결혼 후 둘은 작은 집에서 시작해 차근차근 모든 것을 함께 완성해 가기 시작했다.
벽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엄마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좋은 남편에 든든한 부모 그리고 자기 앞가림하며 알아서 살아내는 자식들. 이 중 하나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반인데 엄마는 왜 자꾸 모두 가진 사람들만, 높은 곳만 보면서 살아?"
엄마가 바라는 대답이 뭔지 알면서도, 예전처럼 입발린 말이라도 엄마가 듣고 싶은 그 위로를 해주고 싶지가 않았다.
대학진학을 앞둔 고3 즈음이었던 것 같다. 대학 결정을 앞두고, 인생에서 처음으로 엄마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털어놓았다. 그리고 날 위해 어떤 희생도 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만 같은 엄마에게 한 번 울분을 토한 적이 있었다. 그때 들은 엄마의 대답은 십수 년이 지나도 증발되지 않고, 각인되듯이 남아있었다.
"너는.. 왜 그렇게 높은 곳만 보고 사니. 우리보다 더 못한 사람들도 많아."
나는 그 말이 그렇게 아팠다. 높은 곳을 감히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지탄받는다는 것이 어린 마음의 가장 여린 부분을 깊숙이 찔렀다.
엄마에게 그렇게 얘기했던 걸 기억하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그랬니? 높은 곳을 보고 사는 거 좋지 왜 그랬을까.."
결혼하기 직전, 마지막 여행으로 네팔을 택했다. 아빠와 태백산을 매주 등산하며 보낸 생애 초기 10년의 기억은 내 평생의 취향이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함께 산에 갔고, 괴로움을 홀로 삼켜야 할 때도 산에 갔다. 네팔의 안나푸르나는 내가 생각하는 가장 높은 산이었다.
일주일 간 하는 일이라고는 걷고, 또 걷고 해가 지기 전에 롯지에 다다르면 차가운 방에 몸을 누이고 잠을 잔 뒤 다음 롯지를 향해 또 걷는 것뿐이었다. 가끔은 몇 시간씩 내리막길을 내려가기도 해서 대체 이 길이 맞는 건가 싶기도 한 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걷는, 흡사 고행길 같은 이 길이 주는 유일한 희락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높이 솟은 설산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고르고 감탄을 뱉어내는 일이었다.
그렇게 잠시 잠깐 높은 곳을 보고 나면 다시 다리를 움직일 힘이 났다. 그걸 수 십 번, 수 백번 반복하다 보니 나는 올려 보고 있던 그곳 위에 서 있었다.
산을 오르는 중 부러웠던 건, 쉐르파를 대동하고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쉐르파는 히말라야 산맥 등산을 도와주는 네팔 현지인으로서, 그들은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이자, 짐을 들어주는 포터이자, 식사를 책임지는 요리사이기도 하다. 전문 산악인이 아닌 일반인들이 고용하는 쉐르파는 대부분의 짐을 지고 먼저 빠르게 롯지로 이동해 식사준비를 해 놓는다. 그러면 가벼운 개인짐만을 메고 롯지에 도착한 등산객은 준비된 식사를 먹고 바로 잠을 청하면 된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딱 하루만 걸어보면, 이 배낭만 없다면 날아다닐 텐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래서 가벼운 배낭 하나를 메고 나를 슝슝 지나치는 사람들을 보면 쉐르파 생각이 절실해진다.
남편 없이 아이들을 책임져야 했던 25년 전의 엄마는 쉐르파가 되어 내 짐을 들어주기에는 자신의 짐이 너무나 무거웠고, 내 길을 안내해 주기에는 자신의 삶의 방향도 잃어버린 상태였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너의 쉐르파가 돼줄 수 없어.'라고 인정하기보다는, 내 고개를 숙이게 하는 걸로 그래서 높은 곳을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는 걸로 그 상황을 모면했는지도 모른다.
높은 곳을 보고 사는 것은 나쁜 것도, 허황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내 마음속 깔린 이 잘못된 소프트웨어를 삭제하기까지 많은 세월을 허비했다.
안나프루나에서의 5일째 날, 우리는 모두 같은 곳에 도착했다. 쉐르파가 있건 없건말이다.
쉐르파가 있었던 이들보다 나는 좀 더 고되었고, 좀 더 많이 멈추었지만 그래도 나도 그곳에 올라섰다.
무거운 짐에 단련된 덕분인지, 이틀간의 내려오는 길은 소풍길처럼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필요했던 건 쉐르파가 아니었다.
"고개 들고 높은 곳을 바라보자. 멈추고 싶을 때면 저 멀리 안나푸르나 봉오리가 황금색으로 물드는 걸 마음껏 바라보고 난 뒤 다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자."
그 말이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