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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피 Jul 09. 2019

1. 17년 12월 유럽에서의 42일 여정의 시작

필름 카메라, 아이폰, 6년 된 DSLR로 풀어가는 이야기

지금부터 2년 전 12월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처음으로 홀로 장기 해외여행을 한 이야기이다.
나의 가장 친한 대학 동기인 혜선이는 1학년이 끝날 즘 무렵에 갑자기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땅 리옹에서의 1년 반 어학연수를 마치고 파리지엔느의 삶을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날은 쌀쌀하고 좁은 방 한켠에서 매일 인종차별을 당하면서도 굳건하게 버티던 내 친구는 울지는 않았지만 보이스톡 너머로 들려오는 음성에는 우울함이 가득했다. 친구는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홀로 보낼 생각을 하면 슬프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겸사겸사 모아둔 돈으로 항공권을 예매했다. 학생 신분으로 부모님의 도움을 최대한 받지 않으려고 저렴한 항공권을 찾다 보니 국적기 이기는 하지만 기간이 다소 길고 친구의 시험 기간과 겹치는 날로 표를 끊게 되었다. 이게 42일 여정의 시작이었다.

함부르크의 도달 전까지
자취방에서 나와서 공항으로 가기 위해 공항버스 정류장에 가야 했는데 택시를 타고 가려했더니 20분간 승차거부를 당했다. 번호까지 외울 정도로 많은 택시들을 보내고 마지막으로 개인택시 기사님이 가신다고 하셔서 기본요금에도 불구하고 현금으로 오천 원을 드렸다. 공항에 도착해서 이미 좌석을 설정한 상태라 셀프 체크인하고 짐을 맡겼는데 17kg밖에 나오지 않았다 6kg이나 비다니 기적이었다. 오버차지에 쫄보가 되어서 소주 하나 뺀 게 조금 후회가 되었다. 중국엔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면세품 인도장은 시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대기자 수가 100명이 넘어서 보딩 시간이 시작되었을 때 포기한 심정으로 직원에게 물어보니 보딩 시간이 된 사람은 먼저 챙겨주신다고 하셨다. 어렵게 면세품을 찾고 아슬아슬하지 않게 탑승에 성공했다. OZ501 파리행은 오래된 거고 OZ502는 좋은 비행기라고 했다. 501은 usb슬롯조차 존재하지 않아서 12시간 비행에 보조배터리가 필요했다. 다행히도 아이패드를 챙겨 와서 12시간 비행이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내 무거운 케리어를 끌고 가는 친구의 뒷 모습과 집 근처에서 보이는 에펠탑 (아이폰)

17년 12월 4일 파리 늦은 저녁 샤를 드 골 공항으로 입국했다. 현지인인 친구를 따라 수다를 떨며 걸으니 금방 파리 시내에 도착했다. 방 한켠에 짐을 놓고 근처에 연 작은 음식점에 갔다. 처음 파리 도착해서 먹은게 에스카르고와 오리스테이크 였는데 평소에 있지도 않은 베지테리안 마인드가 샘솟아서 내가 먹지 않았더라면 푸른 상추밭에서 풀 뜯어먹고 살 텐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흙내 때문이다. 그리고 까르푸 마트에 가서 이것저것 샀는데 파리도 물가가 비싸다는데 한국에 비하면 기적을 보았다. 내가 알콜쟁이가 되지 않기를 빌었다. 다음날 아침 친구의 아침 수업을 따라나섰다. 제8대학으로 가는 지하철은 작고 사람들로 가득 찼는데 오래돼서 소음과 이동하는 철도의 느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치 얇은 신발을 신고 고속도로를 뛰는 느낌이었다. 파리 제8대학은 홍대의 건물만큼 미로였는데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도서관이 무척 이뻤다. 커다란 강의실은 강단이 아래에 있고 학생들은 계단식으로 앉는 곳이었는데 교수님이 질문을 자주 해서 나에게 돌아올까 조마조마했다. 쉬는 시간에 카페테리아로 가서 친구의 동기들과 인사를 했는데 프랑스 친구 한 명이 쫓아와서는 영어로 인사를 해도 불어로 답변을 해서 내 친구는 분노했다. 이것이 프랑스에서의 인종차별의 시작이었다. 내가 상해에서 공부했을 때 만났던 프랑스 친구들과 사뭇 달라서 의아했다. 리옹에서 인종차별을 받고 무서워하던 친구의 마음을 백분의 일정도 이해할 것 만 같았다.

‘Words in the mouth’의 외관 (필름 카메라)

수업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파리 시내 쇼핑을 시작했다. 말이 좋아 쇼핑이지 배낭여행에 가까운 나는 우선 지갑을 붙들어야 했다. 마레 지구에서 쇼핑을 하다가 "Les mots a la bouche"라는 서점에 들렀다. ‘입속의 말들’이라는 파란 간판의 서점이었는데 지하로 내려가면 LGBT 서적이 한가득이었다. 당연히 라이언 맥 긴리나 데이비드 호크니 책도 많았는데 라이언 맥 긴리가 자신의 남편을 아이폰으로 담은 사진들을 묶어 만든 가족사진집이 있었다. 처음에 단순히 취지가 내 꿈에 가까워서 계속 생각이 났는데 알고 보니 전 세계 한정판이었다. 한정판 넘버링 소리를 듣고 한국에서의 가격을 검색했는데 한국에는 매물조차 없고 일본에서도 2배가 가까운 금액에 팔고 있었다. 결국 나는 브뤼셀로 떠나는 아침에 친구에게 돈을 쥐여주고 부탁을 했다. 나중에 듣기로 마지막 남은 책이라고 했다. 그 책은 지금 내가 가진 사진집 중에 당연 보물 1호가 되었다.

위에서 말한 라이언 맥 긴리의 책 (아이폰)

친구와 2일 동안 다시 만난 감회를 다지고 반가움을 뒤로 한채 시험 기간인 친구를 위해서 브뤼셀로 떠났었다. 브뤼셀을 방문한 이유는 오직 르네 마그리트 미술관을 보러 가기 위함이었다. 나의 영감의 원천이고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플릭스 버스를 타고 5시간을 이동해서 브뤼셀에 도착했다. 오후쯤 도착했는데 겨울의 해는 일찍 저물어 어둑어둑했다. 호스텔 체크인을 하고 한창인 크리스마스 마켓을 하는 광장으로 향했다. 사실 광장 골목에 위치한 숙소라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캐럴이 화장실 BGM이었다.

17년 12월 6일 숙소 앞 그랑플라스 광장 (아이폰)

벨기에는 역시 와플과 감자튀김의 본고장이었다. 달달한 초콜릿이 당기기는 하지만 콧물을 흘리면서 감자튀김과 마트에서 산 맥주를 마셨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브뤼셀 첫날밤의 기억은 이랬다. 2일은 내가 바라고 바라던 르네 마그리트의 전시를 보러 갔다. 국제학생증을 발급받아 가서 미술관 투어 취지에 맞게 유용하게 잘 사용하였다. 마그리트 뮤지엄은 학생 할인 2유로인데 콤보로 위층에 위치한 뮤지엄 입장권까지 구매했다. 2층 미술관 로비는 의자가 있고 시끌벅적해서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는데 유럽을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엄마는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그래서 이후로도 촬영이 가능한 미술관에서 종종 엄마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쓸쓸한 1인 미술관 투어에 엄마는 그나마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브뤼셀의 12월 날씨는 구글에서 찾아본 거보다 더 피부에 와 닿았다. 발가락이 시려왔기 때문이다. 유럽의 겨울 날씨는 생각보다 습하고 우중충했다. 오후 3시에도 비가 올 거처럼 갑자기 흐렸다. 그래서 나는 쇼핑몰로 향했는데 마침 구석에 서점이 있어 들렀다. 내가 그나마 알아듣는 언어는 영어인지라 주로 아트 서적과 동화, 아시아 문화 쪽을 주로 들여다보는데 한국에 관한 책 보다 북한이 거론되는 책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성당 투어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지를 의미 없이 기록하고 다시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때의 느낌을 다시 되돌아보는 게 기억으로 집어 보는 것보다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뤼셀은 장갑을 급하게 사야 할 만큼 추워서 밖에서의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는데 이 부분이 아쉬워 언젠가 다시 한번 브뤼셀에 가고 싶다. 다음날 함브루크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 떠나야 했다. 그래서 이른 초저녁에 잊지 못할 감자튀김과 복숭아 맥주 한 병과 정말 신선 했던 애플 민트 주스, 요거트 한 팩, 스머프가 그려져 있는 비스터 머스터드 한 병을 사들고 숙소로 갔다. 그날 저녁 벨기에 축구 경기가 있었는지 벨기에 국기를 두르거나 유니폼을 입은 투숙객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다음날 아침 6시 반에 방문 앞에 쓰러져 있는 내 침대의 밑 칸을 사용했던 여자분을 들여보내고 공항으로 향했다.

브뤼셀의 와플 말고 또 다른 명물 오줌싸게 동상 (DSL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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