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ON
성북은 예전부터 문화예술 활동이 두드러진 지역이다. 성북동에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듯이 이태준, 조지훈, 한용운을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살았다. 이웃 동네인 정릉 역시 많은 예술가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동네이다. 6.25 전쟁 이후 부산 등지로 피난 갔던 사람들이 서울 여러 곳으로 모여들었는데 정릉도 그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릉에는 어떤 예술가들이 살았을까?
성북구립미술관 <정릉시대> 전시를 통해 정릉의 예술가들과 그 작품을 만날 수 있었는데 미술, 음악, 문학 세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참조: 정릉시대展 도록
박고석(1917~2002)
그는 산과 자연이 가지는 무궁한 색채와 변화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았다. <치악산>, <백암산>, <쌍계사길> 작품은 그의 전성기 때 그려진 그림이다. 박고석 화가는 1955년에 정릉으로 이사를 왔다. 정릉에 있는 동안 여러 예술가들이 드나들었는데 이중섭과 한묵은 그의 집에 잠시 머물기도 했다.
이중섭(1916~1956)
당시 이중섭은 큰 전시를 치르고 일본에 있는 가족을 만나러 갈 계획이었지만 그림이 팔리지 않아 일본으로 가지 못 하고 그 이후 건강악화로 동선동에 있는 정신병원에 머물게 된다. 그런 그를 정릉에 살고 있던 박고석이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정릉에서 남긴 이중섭의 작품들은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이다.
한묵(1914~2016)
그는 파리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공간과 리듬의 미적 형상화에 주목해 독자적인 화풍을 남겼다. 한묵은 피난지 부산에서 박고석을 만났고 그 인연으로 박고석이 살았던 정릉에서 잠시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작품 <판잣집 풍경>(1953)은 부산에서 살았던 판잣집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편에선 정릉 시기 그림과 유사해 정릉에 머물 때 그렸던 작품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정영렬(1934~1988)
그가 선택한 주제 ‘적멸’(불교용어로 모든 번뇌를 극복하고 열반에 든 상태)처럼 그는 작품에서 심상의 고요를 탐색하고자 했다. 정영렬이 살았던 정릉 집 가운데 한 곳은 그 터와 건물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특히 마당에서 보이는 북한산이 인상적인데 현재는 그 주변에 빌라가 들어섰다.
최만린(1935~)
그는 전쟁 이후 인간의 본질적인 근원에 대한 탐구를 시작으로 생명의 의미와 근원의 형태를 탐구하는 <태>, <백>, <점>, <O>시리즈 등 현재까지 작품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정릉 집을 손수 지었는데 하얀 담위에 빨간 기와를 올린집으로 사람들은 그집을 ‘불란서집’이라 불렀다.
박경리(1926~2008)
1950년대 후반, 박경리 작가는 청수장 아래쪽으로 이사를 왔다. 당시 이웃이었던 박고석과 함께 <노을진 들녘>을 작업하기도 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작가의 대표작인 토지는 3부까지 정릉 집에서 집필되었다.
박화성(1903~1988)
여류 작가 최초로 신문에 연재했던 대표작 <백화>를 시작으로 활발한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그가 살았던 정릉 집에는 차범석을 비롯하여 목포출신의 문인, 지인들이 자주 찾아왔는데 이렇듯 주변 후배와 지인을 보듬어 품어주는 따뜻한 인품을 지녔다.
신경림(1936~)
그는 작품 속에 서민들의 삶, 농촌과 민중의 목소리를 담아내고자 했다. 많은 작품 가운데 그가 애착을 가진 시는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라고 한다. 이 시는 정릉에서 삼십년 세월을 보낸 어머니의 일상을 담담히 묘사하고 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이것이
어머니가 서른 해 동안 서울 살면서 오간 길이다.
약방에 들러 소화제를 사고
떡집을 지나다가 잠깐 다리쉼을 하고
동향인 언덕바지 방앗간 주인과 고향 소식을 주고받다가,
마지막엔 동태만을 파는 좌판 할머니한테 들른다.
그이 아들은 어머니의 손자와 친구여서
둘은 서로 아들 자랑 손자 자랑도 하고 험담도 하고
그러다 보면 한나절이 가고,
동태 두어마리 사들고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면
어머니의 하루는 저물었다.
강남에 사는 딸과 아들한테 한번 가는 일이 없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오가면서도
만나는 삶이 너무 많고
듣고 보는 일이 이렇게 많은데
더 멀리 갈 일이 무엇이냐는 것일 텐데.
그 길보다 백배 천배는 더 먼,
어머니는 돌아가셔서, 그 고향 뒷산에 가서 묻혔다.
집에서 언덕밭까지 다니던 길이 내려다보이는 곳,
마을길을 지나 신작로를 질러 개울을 건너 언덕밭까지,
꽃도 구경하고 새소리도 듣고 물고기도 들여다보면서
고향살이 서른해 동안 어머니는 오직 이 길만을 오갔다.
등 너머 사는 동생한테서
놀러 오라고 간곡한 기별이 와도 가지 않았다.
이 길만 오가면서도 어머니는 아름다운 것,
신기한 것 지천으로 보았을 게다.
어려서부터 집에 붙어 있지 못하고
미군부대를 따라 떠돌기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먼 지방을 헤매기도 하면서,
어머니가 본 것 수천배 수만배를 보면서,
나는 나 혼자만 너무 많은 것을 보는 것을 죄스러워했다.
하지만 일흔이 훨씬 넘어
어머니가 다니던 그 길을 걸으면서,
약방도 떡집도 방앗간도 동태 좌판도 없어진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걸으면서,
마을길도 신작로도 개울도 없어진
고향집에서 언덕밭까지의 길을 내려다보면서,
메데진에서 디트로이트에서 이스탄불에서 끼예프에서
내가 볼 수 없었던 많은 것을
어쩌면 어머니가 보고 갔다는 걸 비로소 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서른해 동안 어머니가 오간 길은 이곳뿐이지만.
차범석(1924~2006)
그는 극작가로 한평생을 살았으며, 방송국 드라마 대본을 집필하면서 걸출한 작품을 다수 남겼다. MBC 드라마 전원일기 1부를 그가 썼다고 전해진다. 그의 대표작인 <산불>은 연극 뿐만아니라 TV 드라마와 영화로 각색되기도 하였다.
김대현( 1917~1985)
16세 때 현재까지 유명한 동요 <자전거>를 작곡 했으며, <자장가Ⅰ(예쁜 아기 자장)>은 우리나라 대표 자장가로 알려져 있다. 그가 살던 정릉 집은 청수장 가까이 위치해 있어 경치가 좋았고, 현재는 그의 애제자였던 김진우(중앙대 작곡가)가 거주하고 있어 당시 집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금수현(1919~1992)
그는 장모이자 소설가인 김말봉이 지은 시 ‘그네’를 듣고, 그대로 곡을 붙여 국민들의 애창 가곡인 <그네>를 탄생시켰다. 한글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본래 성이었던 ‘김(金)’을 ‘금’씨로 개명했다. 자녀이름 또한 한글로 지었는데 세계적인 지휘자 금난새가 그의 아들이다.
그 당시 교육환경이 열악했는데 이웃들의 요청으로 ‘금잔디 유치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그의 집과 유치원 터는 재개발로 안타깝게 사라졌다.
정리: 차정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