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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일당 Sep 29. 2021

우리는 어디에서나 선생을 만난다

미용실에서 만난 귀인

166일째, 서른 

    오늘은 서른 번째 생일을 앞둔 내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선물은 ‘인생 동안 마음 한구석에 묵혀 놓았던 일 중 하나를 해보기’. 생일 전일제 행사로 실행에 옮긴다. 문 앞에는 저마다 햇볕의 몫을 누리려는 갖가지 크기의 초록이 가득하다. 쭈뼛쭈뼛 문을 열고 들어갔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레 쏠리고 어색한 첫 마디,

 “저 빠마를 좀 하려구요”

 손님의 머리를 매만지던 미용사는 웃으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미용사가 매만지던 머리칼의 주인은 만족한 얼굴로 문을 나선다. 이제 3평 남짓한 공간에는 두 사람뿐이다. 거울을 앞에 둔 의자가 세 개 있었고 공간의 주인은 막 자리를 떠난 이가 앉아있었던 가운데 자리를 정돈하면서 고갯짓으로 왼쪽 자리를 권한다. 나는 얌전히 자리에 앉으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내일 생일인데 저한테 선물을 주려고요...”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댔다. 말하는 도중 괜히 말했다고 생각했다. 공간의 주인은 말없이 가운을 건네준다. 못 들은 것 같다. 다행이지만 뻘쭘하기도 해서 목적 없이 공간을 죽 둘러본다.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는 아이의 그림이 군데군데 종이 채 붙어 있고 어떤 그림은 깔끔하게 액자에 넣어 걸려있다. 색색 가지 사인펜으로 미용실을 소개하는 문구도 있다. 자녀인가 보네 어림짐작한다. 파마 전에 머리를 감겨주는데, 

 “아까 생일 선물로 빠마하러 왔다 했잖아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어요.” 

 수건을 덮어서 망정이지, 순간 얼굴 쪽으로 불이 지펴졌다. 미용사의 손길이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다. 두피와 머리칼이 시원하다. 미용사는 손을 멈추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말을 했는데, 말솜씨도 그녀의 손길을 닮아 능숙하다. 꼭 세계관이 넓은 장편 소설을 준비하는 소설가의 아이디어 보드 같다. 보드에는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어있는데 주제가 다 다른 내용이 밀도 있게 적혀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메모의 내용은 중구난방, 이어지지 않지만 작가의 머릿속에는 촘촘히 짜임새 있는 이야기인 셈이다. 미용사의 이야기보따리가 풀린다. 한 달에 한 번은 두피 청소를 해주어야 하고 그림을 그린 아이는 조카들이고 두피 청소는 단순히 두피뿐 아니라, 삶의 질을 바꾸고 자신은 미혼이며, 사랑하는 임을 만날 날을 기대하는 중이라는 이야기. 운명의 상대라는 주제쯤에서 내 목소리가 커졌던 것 같다. 노련한 미용사는 손님의 반응을 살필 줄 알았고 그 손님의 관심사를 알아챘다. 그때부터 이야기의 카테고리는 좁혀졌다. 미용사의 연애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너무 어렸고 뭘 몰랐다는 얘기였는데, 나도 지금 어리다면 어리고 모르는 게 참 많다며 어느새 공감의 박수로 손뼉을 탁탁 쳐가며 자연스레 내 고민을 털어놓고 있었다. 연애 이야기보따리는 두런두런 두 사람의 대화 리듬을 타고 원줄기로 흘러가 인생의 보따리를 당긴다. 그리고 그 보따리를 풀어헤친다.  

 “공치는 날은 공치는 대로, 손님이 오면 오는 대로 수고했다~하고 오늘을 살아요.”

절로 단전 아래에부터 끈적하게 올라오는 질문,

 “힘들 때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극복이랄 게 있나요. 죽고 싶다고 생각할 때 아버지가 쓰러졌거든요. 수발을 들어야했어요.  죽을 시간이 없었죠.” 

목이 매였다. 그녀의 사연이 기구해서가 아니다. 추상적인 인생의 모양이 그녀의 얘기를 통해 별안간 내 앞에 그 모양을 선명히 드러내는데, 그것에 압도당한 나머지 목이 맨 것이다.  

 “나는 젊은 청년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그러려니 해요. 죽지 말고 살기만 해요. ”

 자기를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싫어하는 타입’이라고 소개하는 미용사는 오늘 처음 본 청년에게 힘내라고, 살라고 비나리한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의 말이 귓구멍에 대롱대롱 달린 것처럼 맴돈다. 

 “그러려니 해요. 살기만 해요.”

 귓구멍으로 들어온 주문은 달팽이관을 지나고 눈과 코, 목구멍을 지나고 폐, 심장으로 흐른다. 심장은 주문을 듣자 힘차게 다시 온 몸의 혈관으로 그 주문을 전달한다 “살기만 하라”. 오늘 이 만남은 신이 서른을 맞는 내게 준 선물일까. 생일을 혼자 기념하기 위해 갔던 동네 작은 미용실에서 생기를 얻는다. 아지랑이처럼 온몸에서 피어오르는 생기, 태초의 것 같은 신선한 기운. 말 그대로 죽지 말고 살라는 응원을 받는다. 오늘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칭찬을 받아 마땅한 일을 한 것처럼 고귀한 느낌으로 충만하다. 살기만 하자, 살기만 하자. 오늘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나, 잘 하고 있다. 미용실 문을 나서는데 전신 마사지 풀 코스를 받은 것처럼 몸이 개운하고 마음은 쾌청하다. 아, 빠마도 설익은 짜파게티처럼 고불렁고불렁 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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