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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일당 Oct 06. 2021

벗을 환대하는 법

흥에 겨운 못난놈들

168일째, 서른

 308.4km(자가용 기준) 떨어져 있는 곳에서 벗이 온다. 벗이 나에게 오는 일은 마음과 시간을 동시에 쓰는 마법 같은 일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마음이 쓰일 수 있다. 습관처럼 친구목록을 주왁 내리는데 바뀐 카톡 프로필을 보거나 우연히 네가 좋아하는 노래가 들리거나 할 때 일렁일렁, 네가 내 마음에 일어난다. 그리고 나는 네게 마음을 쓴다. 여기까지 당사자인 ‘너’는 알 길 없다. “벗아, 잘 지내?”라는 기별을 넣으면 비로소 너는 안다. 마음이 일어났을 때 마음을 쓰는 일에서 그칠지, 시간을 써서 기별을 넣어 마음을 전할지는 오롯이 나의 몫이다. 마음까지만 쓰든, 거기에 시간을 덧붙여 쓰든 누가 뭐라 하랴, 어디까지나 내 마음, 내 시간인 것을.  내가 알 수 없더라도 누군가가 나를 두고 마음을 쓴다면 고마운 일이다. 만일 안부 인사를 받는다면 그 사람이 마음과 시간을 함께 쓰기로 한 일이기에 더욱더 고맙기가 그지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쓴 마음을, 안부 인사를 각별히 여긴다. 그런 벗이 내게로 온다고 한다. 거기에 대한 나의 보답은 환대이다. 나는 ‘환대’라는 단어를 나의 삶만큼 애정한다. 환대의 사전적 뜻은 이렇다.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함’. ‘반갑다’, ‘맞이하다’, ‘정성’, ‘후하다’, ‘대접하다’. 한 어절 한 어절, 정답지 않은 구석이 없다. 환대는 벗이 어느 때, 어느 시로 온다는 약속에서부터 시작된다. 며칠 전부터 ‘벗을 무슨 수로 반갑게 맞이할까?’, ‘어떤 볼거리, 먹을거리로 정성껏 대접할까?’ 따위의 고민을 시시때때로 한다. 그리고 벗이 머무르는 동안 함께할 시간을 상상한다. 상상하는 동안 벗을 맞이하는 마음도 덩달아 준비되고 그 틈으로 기대와 설렘이 자리한다. 그러니까 나는 벗이 오기도 전에 이미 그녀를 맞이한 것과 진배없는 행복을 누리는 재미로 쏠쏠하다. 

 그 행복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이면 어느새 나는 그녀를 맞으러 기차역에 가는 길 위에 있다. 그녀도 나의 환대로 오는 길, 나와 다를 바 없을 줄로 안다. 역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노라면 가슴 속에 빵빵하게 분 풍선이 있어서 아슬아슬하고 붕 뜰 것만 같은 기분이다. 연신 두리번거리며 벗과 닮은 실루엣을 애타게 찾는다. 그리고 벗의 모습이 손톱 크기만큼 드러나고 점점 커진다. 마침내 내 얼굴과 내 키만큼 커졌을 때 허수아비 같은 팔로 벗을 얼싸안는다. 그녀의 등을 토닥이는 손짓 하나에 수고했어, 둘에 잘 왔어, 셋에 반갑다는 인사.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신경림 시인의 '파장'시의 첫 대목의 시구는 참이다. 그동안에 환대를 준비한 만큼 벗과 함께하는 사소한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에 담긴다. 

홍콩식 디저트와 커피를 파는 가게였는데, 벽에 하이얀 격자식 타일이 붙여져 있었어. 너는 늘 아이스아메리카노, 한겨울에도 아이스아메리카노지. 기본 빵과 달곰한 크림과 버터가 같이 있는 빵 중에 버터가 있는 걸 시켰지. 주문한 커피와 빵이 나오고 네가 철로 된 트레이를 들고 왔지. 손으로 먹어도 되지만 칼로 부스러기 많이 떨어뜨리며 잘랐더랬지 같은 것들.

벗과 주고받는 말들이 좋다. 말의 내용도 물론이거니와 그냥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 좋다. 너의 주관이 좋다. 나와 비슷한 부분은 비슷해서, 다른 부분은 달라서 좋다. 

 함께 먹는 식사도 환대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나는 이 식사를 ‘북돋는 식사’라 이름 붙였다. 스테이크를 곁들인 토마토 파스타가 맛있는 레스토랑에 왔다. 스테이크를 따로 안 시켜도 되어서 일거양득이다. 내가 고기를 잘라도 되지만 그러지 않는다. 고기를 보기 좋게 굽고 자리에 놔두는 게 너의 자랑이니까. 나는 그녀가 맘껏 거드름 피우는 게 보고 싶어서 부러 고기를 자르지 않고 그녀의 몫으로 남겨둔다. 이유는 모르지만 육고기에는 붉은색 포도주를 먹는다더래. 글라스 와인을 두 잔 시킬게. 술을 사랑하고 즐길 줄 아는 너를 위하여, 또 그런 너의 흥취에 전염될 나를 위하여. 환대란 상대방이 알아주면 그것대로 좋고 아니라도 그것대로 아쉽지 않은, 나만의 흥취. 비밀스럽고 음흉한 장치. 이 세상에 환대를 누리는 못난놈들이 많아지면 꽤나 살만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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