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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진영 Apr 08. 2019

잘못된 삶은 없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장애나 질병이 사라지면
우리는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재작년 여름, 서울 모 병원에서 유전상담사를 인터뷰했다. 당시 나는 사보에 유망직종 종사자의 인터뷰 기사를 연재 중이었고 유전상담사는 이 코너의 세 번째 주인공이었다.


유전상담사는 태아의 유전 질환을 검사하고 예측하여 대응책을 제시하는 일을 한다. 유전상담사가 유망 직종이라는 건 유전 질환을 검사하려는 사람이 많다는 방증일 터.


‘유전상담이 지금보다 저렴해지면 어떨까?

'기술이 발전하면 사라지는 질병이나 장애도 있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거리를 걷던 기억이 난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질문이 이어졌고 마지막 질문에 이르렀을 즈음 회사에 도착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으면서 이 날이 자주 생각났다. 감당이 되지 않아 내려놓았던 마지막 질문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딱 하나.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답을 찾았다는 것.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덕분이다.

 

겉보기에 아무리 별 볼 일 없는 사람도 모두 자기만의 색을 가진다. 다만 그 색을 드러낼 기회와 자원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을 뿐이다. 어떤 이들은 그 기회가 차단되어 고군분투하며 만들어 낸 분명한 색깔을 타인에게 전혀 존중받지 못한다.

정신병원이나 요양원, 장애인시설에서 수개월, 길게는 수십 년을 사는 사람들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들이 장애가 있거나 환자이거나 작은 공간에 갇혀 있어서가 아니다. 자신의 고유한 인격을 존중받지 못하고, 나아가 오랜 집단생활을 통해 인격을 아예 소거당하기 때문이다. 고유성을 존중받지 못한 인간은 흐릿하게만 기억된다.


인간은 신체를 훼손당할 때 인격체로서의 존엄성에 큰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개인이 가진 고유한 이야기, 특유의 욕망과 선호, 희망, 자율성으로 구성되는 개별적 인격성을 인정받지 못할 때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존엄성을 크게 훼손당한다.


장애인이자 변호사인 김원영은 질문한다. 장애, 질병, 가난, 성적 지향 등으로 이른바 ‘실격’당했다고 취급받는 이들의 삶은 정말 ‘잘못된’ 것이냐고. 그리고 잘못된 삶이라 규정받는 이들의 편에서 변론한다. 그의 정교한 사유와 치밀한 논증을 읽다 보면 시도 소설도 아닌 글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싶다. 장애인으로서 자신을 수용하고 이해하기 위해 애써온 그의 삶이, 태도가 '예술'에 가깝기 때문일 테다.


2년 전, 유전상담사를 인터뷰하고 돌아가는 길에 떠올린 마지막 질문에 대해 이제 나는 김원영 저자의 말을 빌려 이렇게 답하려 한다. 이 책에 큰 빚을 졌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질병과 천재성, 인간적 고유성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그렇기에 유전 질환과 질병을 완전히 없앤 사회가 더 풍요롭고 흥미로운 세계일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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