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이래 처음으로 후배가 생겼다. 올 초, 다른 팀에서 선배 한 명과 후배 한 명이 우리 팀으로 옮겨왔고, 내가 속한 홍보마케팅팀은 4명에서 6명이 됐다.
새로운 팀원이 오고 처음 진행하는 회의에서 나는 그간 내가 하던 자잘한 일 하나를 후배에게 넘겼다. 회사에서 한 사람당 5만 원씩 지급하는 복지비를 관리하는 업무였다. 매달 마지막 주에 한 달간 쓴 영수증을 모아 지급결의서를 올리는 단순한 일이었다.
누구든 후배가 생기면 그 일부터 넘겨주리라 생각해 왔다. 처음 입사했을 때 내가 바로 위 선배에게 물려받았던 것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자잘하고 번거로운 일이기에 막내인 내가 하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회사는 위계가 있는 곳이고, 누군가 해야 한다면 입사일이 가장 늦은 내가 하는 게 나도 편했으니까.
그런데...
후배에게 복지비 관리를 넘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배와 함께 우리 팀으로 온 선배가 나를 찾아왔다. 선배는 후배가 일이 많은데 복지비 관리 업무까지 하기 힘들 것 같으니 한 달에 한 번씩 자신을 포함해 셋이 돌아가면서 하자고 했다.
‘응? 내가 7년간 해온 그 단순한 업무를, 그래서 이제야 후배에게 준 그것을 다시 셋이서 돌아가면서 하자고?'.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되는 구석이 없었다. 팀 이동과 함께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어 종일 홍보 아이템을 찾는 게 주 업무인 후배가 일이 많다는 건 누가 봐도 억지였고, 설사 그렇다 해도 한 달에 한 번 영수증을 모아 제출하는 일이 어려워서 못한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직급에 관계없이 출장 다녀오면 누구나 하는 그 일을 못하겠다고? '설마 남자라서 안 하겠다는 건가......?' 애초에 후배의 성별과 상관없이 업무를 인계할 생각이었던 나는 그제야 다른 팀에서는 막내 사원이 아닌 막내 여직원들이 이 업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날 오후, 나는 선배에게 정식으로 항의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요구라고, 부장님이 계신 팀 회의 시간에 허락을 받고 공식적으로 인계한 거라고. 만약 어려움이 있었다한들 당사자가 직접 나한테 말하는 게 예의고, 당신은 실수를 했으며 나는 매우 불쾌하다고.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두 분의 처사는 으레 여직원이 하는 일로 여겨지는 이 자잘한 업무를 남자 직원이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처럼 들린다고.
모멸감에 휩싸인 나는 언성을 높였고, 선배는 계속 내 태도를 지적하며 말했다. 본인은 첫 회의에서 내가 공식적으로 복지비를 넘기겠다고 한 말을 ‘듣지 못했고’, 7년간 내가 복지카드 관리를 해왔는지 ‘몰랐다’고. 선배는 내내 자신은 몰랐고, 못 들었으며 본인은 여직원들만 하던 탕비 업무를 '도와줄' 의사까지 있는 사람이라고 강조했지만,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클럽하우스가 한창 화제였던 어느 날, '교회를 떠나지 못하는 교회 중독자들'이라는 주제로 열린 방에 들어갔다. 20대 여성으로 보이는 발언자가 자신이 청년 회장이 되기를 희망했으나 교역자들에 의해 거부되고, 본인의 남자 친구가 지정됐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교회 내 차별에 관해 이야기했다. 여러 종류의 차별 이슈가 나왔지만 발언하는 당사자가 20대 여성이었기에 성차별이 가장 밀도 있게 다뤄졌고 대화의 주제는 교회 내 성차별로 흘러갔다.
여성 참여자의 발언이 이어지는 동안 자신을 작은 교회의 목사라고 소개한 40대 남성이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했다. 그는 “여성들이 부당함을 이야기할 때도 살갑게 이야기해주면 좋겠다”고 했고 여기에 다른 여성 참여자들이 불쾌감을 표하며 남성들의 전형적인 태도라고 꼬집자 '허허' 웃으며 머쓱해했다. 그러나 머쓱해하면서도 끝내 마이크를 놓지 않았고 계속 문제적 태도와 발언을 이어갔다. 여성 참여자들이 더 강도 높게 불쾌감을 표하며 항의하자 이번에는 “남성들이 몰라서 그렇다”고 항변했다. 이어 신학교 커리큘럼에 젠더 교육이 없어서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다며 남성들이 모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모른다면서 왜 자꾸 말하는 걸까? 나는 외치고 싶었다. "저기요. 자꾸 몰라서 그렇다고, 몰라서 그랬다고 하시는데 얼마나 모르시는지, 왜 모르시는지 잘 알겠고요. 몰라서 실수하셨으면 사과를 하세요. 말씀 그만하고 좀 들으시고요.”
어떤 주제에 대해 잘 모를 때, 말을 아끼고 잘 아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게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이상하게 스스로 지각 있다고 생각하는 몇몇 남성들은 모른다고 하면서 끝까지 마이크를 놓지 않는다. 내가 왜 모를 수밖에 없었는지,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 큰 소리로 이야기한다. 몰라도 되는 것, 모르면서도 계속 말할 수 있다는 게 권력인지 모르고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몰랐다는 큰 목소리 언제까지 들어야 하나. 손에 든 마이크 대체 언제 내려놓을 건가.
모든 걸 아는 사람은 없다. 타인의 삶을 완전히 아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실수하고 산다. 그렇기에 '모른다'는 사실은 실수에 대한 변명이 되기 궁색하다. 우리는 모두 자기 앎의 수준에서 실수하고 사니까. 어떻게 실수를 줄일 것인가만큼 실수했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가 중요한 이유다.
장애인이나 LGBT 성향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실수하고 사과하는 장면을 종종 상상한다. 이성애자이자 비장애인인 나는 그들의 상황을 잘 모르고 앞으로도 완벽하게 아는 오는 순간은 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언제든 실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실수했을 때, 내가 찾은 최선의 방법은 최대한 말을 줄이고, 빠르고 정확하게 사과하는 것. 서로를 완전히 알 수 없는 이 복잡한 세계에서 이보다 확실한 대책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