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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진영 Mar 14. 2018

노래하는 여자, 지은씨


충무로를 찾았다. 퇴사 후 두 번째 방문이다. 충무로는 나의 이전 직장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는 2년간 나와 함께한 지은 씨가 있다.


 올해 나이 서른다섯. 지은 씨는 나의 첫 팀장이었다. 2012년 봄, 우리는 서울 충무로에 있는 편집회사에서 사보 기획자로 처음 만났다. 그녀는 능력 있는 사보 기획자였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내면서도 차분하고 정확하게 일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잘 웃고 농담 잘하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나를 비롯한 회사 사람들은 지은 씨를 ‘일 잘하고 재밌는 사람’으로 여겼다.


우리는 종종 퇴근 후 맥주 한 잔 기울이며 책 만드는 일의 고단함을 풀었다. 시시콜콜한 일상과 그간 살아온 이야기도 나눴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술이 얼큰하게 취하면 지은 씨는 그때마다 노래를 불렀다.  “제가 노래 하나 할까요?”라고 묻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숟가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항상 같은 노래였다.


말없이 널 바라보다 돌아서며
흐느끼던 내 작은 어깰
힘겨워하는 내 모습에 어떤 말도
넌 얘기하지 못한 채 돌아섰지만
널 사랑해 말하고 싶은데 오늘 같은 밤이면
내 눈물로도 널 그릴 수가 있어
지금 이대로 난 변하지 않을 거야
이별마저 아프지 않다고 말했던 나니까
널 사랑해


1995년에 발표된 가수 김정은의 <널 사랑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옛날 가요다. 열에 아홉은 사랑 노래인 한국 가요에서 ‘널 사랑해’라는 제목은 진부하기까지 하다. 왜, 지은 씨는 이 흔하디흔한 제목을 가진 90년대 발라드를 항상 부르는 걸까.


대학교 신입생 시절, 지은 씨는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좋아하는 학교 선배에게 고백했다. 술기운 탓인지 사랑을 향한 거침없는 용기 덕분인지 다른 사람의 눈은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눈이 자신에게로 향했지만, 지은 씨는 오직 한 사람을 보고 있었다. 노래로 마음을 대신했다. 가수 김정은의 <널 사랑해>. 그 순간 떠오른 노래였다.


“글쎄, 왜 그 노래였을까. 당시에는 그 노래가 굉장히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내 마음이 흘러넘쳐서 무언가를 하고 싶었고 그냥 그 노래가 나왔어.”


지은 씨는 머지않아 고백한 학교 선배와 연인으로 발전했다. 8년을 함께 했고, 졸업 이후 자연스레 결혼 이야기가 오갔지만, 지은 씨에게 결혼은 남의 일 같았다. 치열하게 싸우는 부모님을 보면서 자란 탓인지 결혼해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었던 것 같아. 그래서 결혼했는데 그 사람도 그랬나 봐. 나처럼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것 같아. 서로 힘들었지.”


결혼생활은 아슬하게 이어졌다. 분가 문제로 시아버지와 갈등이 깊은 데다 경제적인 부분을 의지하려는 남편을 지은 씨는 신뢰할 수 없었다. 친정에는 내색조차 못 했다. 힘든 마음을 어디에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지은 씨를 더욱 힘들게 했다.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안으로만 삭이던 아픔은 점점 곪았고, 어느 날 결국 터져버렸다.


 “같이 일하는 포토그래퍼랑 술을 마시고 있는데 남편이 데리러 왔다가 포토그래퍼랑 내가 친해 보이니까 오해를 한 거야. 전화로 욕을 막 하는데 도무지 안 되겠더라고. 이해하려고 해봤지만, 내가 대체 왜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하나. 이건 아니다 싶었어.”


스물여덟에 시작한 결혼생활은 2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고, 지은 씨는 서른을 맞았다. 이혼 후 1년은 대상포진으로 아픈 몸을 돌보며 보냈다. 서른하나에 다시 일을 시작했고 차츰차츰 일상을 회복했다. 그 이후 언제부터인가 술을 마시면 늘 노래를 불렀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해 기분이 좋을 때도 그랬다. 어김없이 김정은의 <널 사랑해>였다. 지은 씨에게 그 노래는 추억 그 이상이었다.


“이혼에 후회는 없어. 그냥...그 노래를 불렀던 그 순간이 너무 행복했던 것 같아. 그때의 내가 좋았어. 그래서 자꾸 그 노래를 불렀나 봐. 나는 내가 그 노래를 그렇게 많이 부르고 다녔는지도 몰랐어.”


지은 씨는 이제 술을 먹어도 그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1년쯤 된 것 같다’고 했다. 4년간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진 것도 그쯤이다. 이혼 후 1년 뒤에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만난 남자친구였다. 지은 씨 일상에서 사랑이 밀려나자 노래도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질문을 보고 웃음이 났어. 근데 약속을 잡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언제부턴가 내가 이 노래를 안 부르기 시작했더라고. 그 노래가 나한테 뭔가 생각해 봤어.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이제 다른 노래해야지.”


헤어지고 나서 지금까지 1년 동안 일에만 몰두했다는 그녀는 ‘요즘 마음이 편안하고 좋아’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은 씨는 다시 노래를 부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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