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진영 Jul 16. 2021

그렇게 화낼 일인가 싶었지만


회사에 시험을 보러 온 장애인 수험자가 화장실을 찾았다. 머리 속으로 빠르게 회사 건물을 스캔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장애인 화장실이 없었다. 이 사실을 들은 수험자는 “이렇게 큰 건물에 장애인 화장실이 없는 게 말이 되냐”고, “장애인 수험자는 받으면서 화장실도 준비해 놓지 않으면 어떡하냐”며 항의했다. 고사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올 정도로 큰 소리였다.


저렇게 화낼 일인가?
장애인 화장실 없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붉은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수험자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장애인 화장실을 찾는 사람이 처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애인 화장실이 없다”고 안내하면 대부분 시험 끝날 때까지 참아 보겠다고 하거나 보호자와 함께 다른 건물에서 해결하고 왔다. 그러나 다른 장애인 수험자와 달리 그는 불같이 화를 냈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직원들은 "죄송하다"고 하면서도 내심 그가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일이다. 성차별적 행태를 지적하는 나에게 “그렇게까지 화낼 일인지 모르겠다”라고 하는 회사 선배의 말을 듣고 한동안 무력감에 시달렸다. ‘그래, 너는 정말 모르는구나 그리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구나’ 싶었다. 이런 남성을 마주한 게 처음은 아니지만, 그동안 누적된 무력감과 피로감이 한 꺼번에 폭발했다. ‘좋은 태도’를 강조하던 그 선배는 심지어 ‘나 정도면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경험이 반복 되자 어느 순간 궁금해졌다. 저들은 무슨 심정인 걸까 하고. 도대체 왜 아무리 말해줘도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는 건지, 들을 생각이 없는 건지, 상대의 마음에 공감하기는커녕 자기를 변호하기에 급급한 건지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 고민하다 내가 가진 '비장애'라는 권력을 떠올렸다. 내가 가진 권력에 대입해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남성들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 년 전 있었던 ‘장애인 화장실 사건’이 생각났다.


일명 '장애인 화장실 사건'을 복기하면서 나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 날, 장애인 화장실이 없다는 사실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홀로 분노하던 수험자의 심정이 지금의 나와 같았겠구나 하고. 내 앞에서 항변하거나 억울해 하던 남자들의 심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저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내가 장애인 화장실을 만들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닌데"라며 마음 속으로 항변하던 그 날의 나와 비슷하겠구나 싶었다.


'장애인 화장실 사건'은 내게 ‘우리는 모두 잠재적 가해자’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내가 장애인 화장실을 없앤 건 아니지만, 나는 장애인 화장실이 없어도 되는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 구조에 편승해 혜택을 보는 비장애인이었다. 장애인들의 희생과 불편에 빚진 채로 '비장애인'이라는 특권을 누리는 가해자가 될 수 있고, 그건 그동안 내가 남성들이 제발 이해해 주길 바랐던 여성 차별 문제와 본질적으로 같은 문제라는 걸, 그러니까 이것은 차별적인 개인의 문제이기 전에 구조적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회의 차별적 구조 어딘가에 있는 한 우리는 모두 차별의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다. 개인의 노력으로 차별을 제거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말은 우리는 ‘언제든 실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과 다르지 않고, 그 실수는 내가 가진 권력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나는 무해하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가진 권력이 뭔지 알아야 하는 이유다.


매거진의 이전글 노래하는 여자, 지은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