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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소 Sep 25. 2021

우리 집에는 두 명의 암환자가 산다

시작하면서

  먼저 솔직하게 말해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저는 오랜 세월 아빠를 미워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려 해도 너무 오래전이라 떠오르지 않을 정도입니다. 몇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됐던 주말 드라마 <내 딸 서영이>를 보며, 아버지가 죽었다고 거짓말한 주인공 서영이의 마음을 200% 이해했을 정도니까요. 드라마 속 인물들은 모두 서영이를 비난했지만, 저는 서영이가 잘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서영이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저에겐 아빠를 미워할 이유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미움이 더 커지기 전에 집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8년 전의 일입니다. 마침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통근 시간을 핑계로 독립을 한 것이죠. 얼굴을 마주할 일이 없으니 눈덩이처럼 쌓이던 미움은 그대로 멈췄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더군요. 한 번 쌓인 미움이 눈처럼 그냥 녹지는 않는다는 것을요.


  얼어버린 관계를 녹이는 방법이 대화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대화의 의지가 없었어요. 원래도 아빠와는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유일하게 통하는 관심사는 '정치'였는데, 그 마저도 정치적 의견이 달라 대화는 늘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일도 점차 줄어들게 되었죠. 최근 통화목록에서 아빠가 사라진 건 아주 오래전 일이었습니다. 아빠가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누구와 친한지 알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알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죠. 저는 결코 살가운 딸은 아니었어요. 사회에서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저의 모습을 보면, 부모님은 아마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랬던 제가 약간의 철이 든 건 올해 초에 받은 유방암 진단 덕분이었습니다. 저는 아직 서른세 살, 암에 걸리기에는 이른 나이였어요. 자식이 저지르는 가장 큰 불효가 부모님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는 거라고 하던가요? (물론 전 지금 전보다 건강히 살아있습니다만) 한동안 젊은 나이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부모님께 다정하지 못했던 것들이 가장 먼저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 한마디를 하는 게 너무도 어려웠습니다.


"엄마, 아빠! 나 암 이래."


   입에 담기에도 거짓말 같은 이 말을 내뱉었을 때 괴로워할 부모님의 얼굴을 보는 게 너무 무서웠거든요. 용기가 없는 저는 결국 언니를 통해 부모님께 아프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은 바로 다음 날 나이 든 몸으로 저를 찾아오셨죠. 하루 만에 10년은 늙어버린 부모님을 마주했던 그날, 아빠는 저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거 나을 수 있는 병이야. 아무 걱정하지 마."


  아빠의 위로는 '유방암은 낫는 병'이라고 말해준 주치의 교수님의 말과 똑 닮아있었습니다. 게다가 평생 그렇게 다정한 아빠의 말투는 들어본 적이 없었죠. 그 순간 마음속에서는 만년설 같던 미움이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시간은 흘러 6개월 뒤. 수술과 항암치료가 끝났습니다. 앞으로 받아야 할 치료가 남아있긴 했지만 힘든 항암약을 이겨낸 것만으로도 마음이 후련했습니다. 그날은 가벼운 마음으로 첫 정기검진을 받으러 간 날이었어요. 하루 종일 병원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는데, 난데없이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여기서 '난데없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아프고 난 후에도 우리 부녀는 용건 없이 전화하는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아빠의 목소리는 유난히 기운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 아빠의 용건은 간단했습니다. 팥죽을 시켜달라는 부탁이었죠. 평일 이 시간에 왜 집에 있는지, 갑자기 좋아하지도 않던 팥죽을 찾는지 의아해할 만도 한데, 눈치 없는 딸은 아빠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에만 신경 썼습니다. 그래서 군말 없이 집으로 팥죽을 배달시켜드렸죠.


 심지어 그날 저녁, 오랜만에 본가에 간 언니에게서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그 일을 잊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아빠가 아픈 것 같아.'

'응? 어디가?'

'탈모가 엄청 심하고, 기운이 하나도 없고, 집에 이상한 약봉지들이 있어.'


  놀랍게도 언니가 보내준 사진 속 약은 너무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항암 치료를 하면서 제가 먹었던 철분제였으니까요. (이때까지만 해도 설마 설마 했습니다) 분명 부모님은 뭔가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을 추궁할 기세로 나선 언니가 이내 그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제 앞에 놓인 진실은 너무도 잔인했습니다.


"너무 놀라지 마. 아빠도 너처럼 항암 치료하고 있대."


 '아빠가 왜...?' 


  머리를 한 대 크게 맞은 기분이었어요. 수화기 너머 들리는 언니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빠가 대장암 투병 중이고, 간 전이된 4기 환자라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단숨에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도저히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암환자라는 사실을 들은 아빠도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암환자로서 먼저 항암치료며, 수술 등을 겪어봤기에 아빠가 앞으로 겪게 될 일들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젊음으로 견뎌낸 그 치료를 나이 든 아빠가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하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솔직히 한 집에 두 명의 암환자는 너무한 것 아닌가요? 만약 신이 있다면, 보이지 않는 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에 불행은 또다시 저를 찾아왔습니다. 절대 너에게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각오라도 한 것 마냥 겹겹이 저를 둘러싸고 있었죠.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투병일기를 썼습니다. 독한 항암제가 저의 몸을 치료해주는 동안, 일기는 마음을 치유해주었죠. 남들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은 이 이야기를 글로 적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빠가 다시 건강을 회복하는 날까지, 그래서 우리 가족이 웃을 수 있는 날까지 이 글을 계속 이어가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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