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네 Apr 25. 2016

나의 비밀

2016.4.25


말이란 것은 참 거대한 존재입니다.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들 중에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편리한 것이 '말'이라는 것은, 또한 보편의 사람들에게 큰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방금 말 했지만 '말'은 편리합니다. 그래서 의사소통을 하기에도 편리하고, 누군가에게 위로나 응원의 말을 하기에도 편리하며, 상처를 주기에도 더없이 편리한 수단입니다. 

나는 솔직하게 말 하는 것이 두렵지 않은 편인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솔직하게 말하려 마음먹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고, 또 관계가 가까워져야한다는 애로사항이 있지만, 그래도 솔직한 편입니다. 그리고 나는 말도 많은 편입니다. 이야기도 곧잘 하곤 합니다. 나서서 하는 말은 또 조리있게 제법 흉내낼 줄도 잘 압니다. 그런 내가 잘 하지 못하는 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응원 혹은 위로의 말입니다. 나에게는 그 말이 세상에서 가장 건네기가 무서운 말입니다. 



사랑하는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날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사 생로병사의 이치는 맞지 않습니다. 저는 그 부고를 뉴스로 먼저 봐야 했습니다. 그런 일이었고, 그런 날이었습니다. 그 날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그 이후로도 많은 날들이 하나의 거대한 시기로 뭉쳐져 고통처럼 그에게 박혀있을 것 같으니 '그 날' 하루로 단정하여 말하기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표기상의 '그 날' 이후로 많은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그 친구가 정말 많이 걱정이 되고, 많이 보고싶고, 또 힘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나는 그 친구의 고통에 책임을 질 자신이 없었습니다. 위로는 그 사람의 마음을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말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감히 겪어보지 못한 내가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아주조금이라도 내가 너를 생각하고 있노라고는 전달을 하고 싶었습니다. 기껏해야 가끔 글자 몇 줄을 전달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나는 친구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 고통을 모르는데 마치 다 이해하는 듯한 표정이 그에게 어떠한 감정으로 다가가게 될지 무서웠습니다. 혹여나 그 표정이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고 했을지언정, 나는 여전히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로 그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까요. 중요한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 이후로 그 친구는 다시 제 가까이로 와 지냅니다. 시간도 꽤나 흘렀고 흐른 시간만큼 그 친구의 생채기는 조금이나마 아물었을까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도 그 상처의 아픔을 가늠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 친구를 말로써 위로할 자격이 없습니다. 

애정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 애인이라거나 하는 형태는 아니고 많이 의지하고 또 사람 그자체로 참 좋아 많이 아끼고 있습니다. 아마 상대방은 모를듯 합니다. 어차피 그런 표현을 잘 하지도 못하기에 한번도 표현은 그렇게 한 적은 없습니다.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햇수로는 2년째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는 멋진 사람입니다. 처음 그를 알게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그가 암 투병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놀라지는 않았습니다만 단단한 사람이기에 저리도 솔직하게, 또 당차게 말 할 수 있는 거란 생각이 들었고, 그 순간 그 사람이 멋져 보인다기보단 그의 고백같은 그 목소리가 그 자리를 서서히 메워가고 있을 무렵, 그 순간의 공기는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자주 본다거나 자주 연락을 하는 형태는 아니었지만 나는 충분히 그를 가까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암이 재발했다는 사실을 나는 글로 보았습니다. 기분이 이상만 합니다. 이러한 소식을 몇 자의 글로 내 눈에 보여지고, 그 글자들이 머릿 속에 박혀 이성을 통해 이해되어질 때의 순간을 나는 똑똑히 기억합니다. 생경한 일입니다. 순간 갖가지 생각들 사이로 감정들이 비져 나왔습니다. 역시나 걱정도 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최소한의 표현정도는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서 내 친구의 '그 날'을,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위로했던 그 순간을 똑같이 떠올려 거기에서 멈추고 맙니다. 나는 이번에도 역시나 자격이 없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내가 말로 하는 어줍잖은 위로라는 것이 그에게 상처로 다가가지 않기를 바라며 최대한의 진심을 눌러담아 말로 전하긴 했습니다만 그 후로 나는 또 그를 말로써 위로할 자격이 없다는 걸 깨달아버립니다. 



이러한 나의 감정상태, 혹은 심리적인 상태를 어떠한 것으로 정의내리고 설명할 수 있는 똑똑한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어쩌면 내가 느낀 이 억겹의 감정들이 허망하게도 단 하나의 짧은 단어로 정의내려질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고있는 그들은 제가 못하는 '이 것'을 잘 하고들 있을까요. 그냥 그것이 궁금할 따름입니다. 나도 위로라는 것을 잘 해보고 싶습니다. 무관심이 더 나쁜거라고들 하지만 나는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의 상황과 그들의 마음을 전부 이해해주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에, 죄책감이 얹어져서 더 어렵기만 할 따름입니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있습니다. 그저 나만의 방법으로, 나만의 시간에, 나만의 공간에서 그러하고 있다는 게 스스로 조금 안타까울 뿐이지만 나는 항상 그들을 사랑하고있습니다. 


그저, 언제 어떻게든 '말'로 편히 연락할 수 있게끔 우리 옆에 항상 붙어있는 이 흉물스러운 핸드폰이 원망스러울 따름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