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혈 청년의 번아웃 극복기
통장엔 여러 해를 모아 찍힌 수천만 원이 있었고, 매달 500만원이 꼬박꼬박 들어왔다.
은행 앱의 한 페이지를 넘기면 한달에 쓰는 돈 300만원 가량의 카드값이 그대로 빠져 나갈 준비 중이었다.
단칸방 같은 아파트를 가졌지만 내 소유는 그중 화장실 한 칸 정도였고, 실질적인 집 주인인 은행에서는 매달 내 월급에서 100만원 가량을 마치 제 것인 양 가져갔다.
멈추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집은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니라고 세상이 외치고 있었고, 무얼 위해 달려왔는지 잊었을 만큼 나는 오래 달렸다. 구르던 발을 멈추면 모든 것이 흩어질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란 생각이 머리를 휘감았다.
하지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다리도 발도, 머리도 그랬다.
매일 죽고 싶었다.
매일 왜 사는 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쿠팡을, 이마트몰을, 컬리를, 트렌비를 뒤지며 끝없이 음식과 물건을 샀다. 전쟁같던 근무가 끝난 날이나, 상사에게 쪽을 당한 날에는 공작새처럼 한껏 차려입은 채로 백화점에 가서 가격표를 보지 않고 물건을 골랐다.
일반 제품보다 2배가량 비싼 올리브유나 치약을 파는 가판대 아주머니들에게 물건에 대한 설명을 제법 진중한 척하며 들은 뒤 선뜻 샀다. 백화점 반찬을 잔뜩 담아 계산한 뒤엔 위층의 명품관을 돌며 가방을 구경하다가 10~30만원대 액세서리를 구입했다.
그러고 나면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음식은 일주일 쯤 지나면 썩어 버렸고, 귀걸이는 서랍 차지가 됐다.
그래도 나는 승리자라는 도취감에 사로잡힌채 누구보다 열심히 발을 구르며, 동시에 매일 죽고싶다고 생각했다.
퇴사는 계획적이지 않았다. 나는 내 월급을 사랑했으며, 달리는 발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몇주 째 가장 늦게 퇴근하던 날이 지속되던 때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이대로는 죽을 것만 같았다. 매일 똑같이 출근해 선후배 비위를 맞추고 토할 정도로 일하다 퇴근하는 삶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심리상담까지 받으며 나는 이 달음박질(이라고 쓰고 월급이라고 읽는)을 지키려 했으나, 끝내 우발적으로 그만둔다고 말한 것이다. 잘 가, 내 월급.
일을 그만두는 과정은 제법 심플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나는 그 기계의 부품 사이에서 제외됐고, 또다른 볼트가 내 자리를 메꿨다.
우발적인 퇴사를 한 나에게 엄마가 한 첫 마디는
"이 서방이 싫어할 텐데. 어떡하냐"였다.
이 서방은 당시 결혼 얘기를 나누던 내 남자친구였다.
나는 엄마와 오래 살았고, 그녀를 잘 안다.
그래서 괜찮냐, 수고했다는 말보다 왜그랬냐는 식의 책망을 들은 게 놀랍지는 않았다.
그저 화가 났을 뿐이다.
엄마에게 소리치며 전화를 끊은 뒤 나는 스스로에게 소리내 말했다.
그리고 빠르게 뛰던 심장이 잦아지며, 정말 괜찮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