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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Apr 08. 2024

운현궁의 봄



 


“뭐? 대원군이 네 명이라고?” “흥선대원군만 익숙해서 그렇지. 왕이 즉위할 때 살아 있었고 섭정으로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크게 알려졌어.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인조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 아버지 전계대원군도 있었어.” 내가 아는 흥선 말고 다른 대원군들이 있었다니. 이 사실을 알고 조금 충격이었다. 


오래 전에 읽었던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이 떠오른다. 이 작품은 1933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역사소설이다. 역사 자체보다 흥선대원군이란 인물에 집중하면서 영웅적 요소를 한껏 부각하고 있다. 대원군이란 후사 없이 죽은 왕을 대신해 종친 중에서 뽑은 후계자의 친아버지라고 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인조의 삼남인 인평대군의 8세손으로 권력의 핵심에 있던 가문은 아니었으나, 그의 부친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감으로써 왕위와 가까워졌다. 그러나 당시 권력을 장악한 안동 김씨들은 쓸 만한 왕족들은 철저하게 견제하면서 심지어 반역의 낙인을 찍어 제거하곤 했다. 한때 세도가들의 음모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이하응이 택한 생존전략은 건달 행세였다.  


상갓집 개라는 치욕적 별명까지 얻으면서도 이하응은 은밀히 조대비와 반전을 준비했다. 조대비는 헌종의 어머니로 안동 김씨 세력에 많이 치인 터였다. 결국 철종의 사후에 조대비에 의해 이하응의 아들 이명복이 후계자로 지명되고 하루아침에 천하가 뒤집어졌다. 상갓집 개로 놀림 받던 이하응은 어엿한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세를 누린다.  


종로 낙원상가 옆에 있는 운현궁은 바로 그 역사의 무대다. 이곳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19세기 조선 정치의 중심으로 조선의 흥망을 상징하는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대원군은 이곳에서 전용문을 통해 궁궐로 드나들며 섭정을 펼쳤다. 세도정치로 피폐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시정잡배 행세를 하며 깨달은 문제들을 과감한 개혁으로 해결했다. 비변사 폐지, 양반 세금 징수, 의복제도 개선, 지방관리 부패 척결 등. 


그러나 당시는 여러 이념이 충돌하는 격변기였다. 서양문물 때문에 유교사회 질서가 흔들릴까 두려워 천주교를 박해하고 쇄국정책을 펴는 바람에 흥선대원군은 신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 결과 역사는 ‘강력한 개혁 정치가’와 ‘보수적인 국수주의자’라는 엇갈린 평가를 동시에 기록한다. 19세기 조선의 정치사를 관통했던 그의 일생은 시대의 모순 그 자체였다. 


<운현궁의 봄>이라는 제목은 상징적이다. 이하응의 가문이 겨울처럼 차가운 고통의 세월을 지내고 드디어 봄을 맞는다는 의미이다. 소설은 대원군이 피눈물로 견디며 훗날을 준비했던 역사의 현장, 오랫동안 쓸쓸했던 이곳에 봄이 찾아왔다는 것으로 그의 시대를 그리고 있다. 


먼 장래를 위하여 온갖 수모를 참고 온갖 고난을 참자. 한때의 울분을 참지 못하여 제로라고 우쭐거리다가 큰일을 저지르면 어리석은 노릇이다. 그들이 자기를 바보로 여기고 속없는 놈으로 여기면, 자기는 더욱더 그들에게 그런 눈치를 보여서 당분간의 안전은 도모하여야겠다. - p.89 


우리가 알고 있는 이하응의 모습은 대부분 이 소설 <운현궁의 봄>에서 비롯한다. 몰락한 종친 이하응은 비루한 '상갓집 개'로 묘사된다. 이후 소설과 드라마에서 항상 이렇게 묘사되기 때문에, 우리는 흥선군 시절의 이하응이 아주 비참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학자들이 정리한 인터넷 백과사전에서도 이하응은 어김없이 시정잡배로 묘사한다.  


그러나 어딘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고귀한 왕족이 잠룡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대원군이 되자 돌변한다? 고귀한 혈통으로 태어나 시련을 겪다가 정상에 올라선다는 신데렐라 만들기 이론은 전형적인 소설 기법이다. 흥선대원군의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한 소설 속 장치가 아니었을까. 실제로 이하응은 그렇게 궁핍하지 않았고, 안동 김씨와는 적당히 협력하며 견제하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였다. 


이하응을 찾아온 봄을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레 현실 정치로 생각이 옮겨갔다. 우리도 봄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올해 치러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또 바이든과 트럼프냐, 새인물이 그렇게 없냐, 누가 대통령이 되든 달라지길 바란다는 기대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11월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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