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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Mar 26. 2024

꽃 아래 봄에 죽기를



 


살면서 수많은 선택지와 마주한다. 오늘 먹을 저녁 메뉴부터 주방에 달 커튼, 새로 옮길 직장까지 많은 선택지와 결정이 있다. 이렇듯 인생은 연속된 결정의 집합체다. 그 결정 중 가장 마지막에 고를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죽을 시기와 장소가 아닐까. 따스한 봄에 꽃나무 아래서 죽는 결정은 쓸쓸하면서 낭만적이다.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은 제목처럼 서정적인 분위기의 추리 소설이다. 기타모리 고 작가는 이 서정적인 작품의 제목을 무사 겸 승려, 시인이기도 했던 사이교의 하이쿠에서 차용했다. 골동품과 민속학에 정통했던 작가는 하이쿠라는 독특한 소재를 이용하여, 생동하는 봄에 늙은 시인의 죽음이라는 역설적인 주제를 애잔하게 그린다. 소설 배경 곳곳에 작가의 이력과 취향이 묻어나는데, 요리사이기도 했던 기타모리 고는 나이와 이력을 알 수 없는 맥주바 ‘가나리야’의 마스터인 구도로 작품 속에 들어와 독자들에게 눈으로 먹는 맛있는 글을 선사한다. 


이야기는 일본 도쿄 산겐자야의 막다른 뒷골목에 있는 맥주바 '가나리야'에서 시작한다. 주인장 구도가 손님들의 고민과 수수께끼를 듣고 사건을 해결하는 안락의자 탐정 역할이다.  


아직 꽃이 필 수 없는 시기, 추운 음력 이월의 보름에 한 남자가 생을 마친다.  프리랜서 작가인 이지마 나나오는 혼자 살다 죽음을 맞이한 하이쿠 동호회 회원 가타오카 소교의 화장식에 참석한다. 화장하고 남은 뼈를 수습할 가족을 찾을 수 없어 동호회가 주관하여 그의 장례를 치른다. 화장이 끝난 후, 소교의 몸에서 골절 치료에 쓰였던 나사를 발견한 나나오는 그가 남긴 하이쿠와 함께 나사를 그의 고향으로 보내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생전 소교의 말에서 그의 고향이 야마구치의 조후라는 정도만 알았을 뿐, 가족을 알아낼 다른 실마리가 없다. 난처한 나나오는 무작정 그의 고향을 찾아간다. 


죽은 남자에게는 말 못할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그의 방에 피어있던 때 이른 벚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남자는 왜 그렇게 죽어야 했을까. 추적해 나갈수록 베일이 하나씩 벗겨지는데... 


이 밖에 다섯 단편소설이 맥주바 '가나리야'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카메라맨 쓰마키는 <마지막 거처>라는 사진으로 보도사진상을 수상한다. 사진은 다마 강변의 오두막에서 생활하는 노부부의 삶을 담은 것인데, 그의 사진전을 위해 거리에 붙여 놓았던 포스터들이 모조리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처음에는 광팬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포스터가 모두 사라지자 일이 커진다. 나름대로 그 이유를 짐작했던 쓰마키는 가나리야의 마스터 구도를 찾아가 머뭇머뭇 이야기를 시작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이 뛰어난 점은 등장인물들이 과거를 되짚어 가며 이야기를 차근차근 쌓아가는 과정이 흥미롭다는 점이다. 기타모리 고 작가는 구도의 시선으로 등장인물의 행적을 그리는데, 그 조화가 굉장히 매끄러워서 소설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단골손님들이 허물없이 털어놓는 수상쩍은 이야기 끝에 주인장 구도의 한마디가 있다. 구도의 추리는 추측에 지나지 않아 그 답이 정답인지는 명확히 말할 수 없지만, 단골손님들은 그가 내놓는 답과 요리에 흡족해한다. 비단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는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주의 깊게 듣고 쉬이 잊지 않는데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들어주고 추리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인다.     


그런데 정작 주인장 구도 데쓰야에 대한 인물 묘사는 소설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무슨 사연으로 후미진 곳에 맥주바를 열게 됐는지, 천부적인 추리 실력으로 미루어 봤을 때 과거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궁금할 만 한데 작가는 끝까지 알려주지 않는다. 독자가 상상할 영역으로 남겨둔듯 하다.  


흔히 추리소설이라 하면 빠른 속도감과 범인과의 팽팽한 심리 대결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작가의 글 속에 트릭이나 복선을 눈치 채려 독자는 시종일관 긴장하며 읽게 된다. 하지만 이 소설은 반전과 미학, 위로가 적절히 어우러져 책을 덮은 후에도 벚꽃 향이 은근하게 맴도는 것만 같다. 무엇보다 섬세하고, 따뜻한 작가의 시선은 작품에서 인간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  


고전의 풍미를 간직한 <꽃 아래 봄에 죽기를>은 반전도 반전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등장인물들의 지치고, 힘든 삶에 따뜻한 위로의 시선이 듬뿍 담겨 있다. 지친 영혼을 쉬어 갈 수 있는 '가나리야' 같은 맥주바가 나에게도 있다면 고단한 삶에 위안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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