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레리뇽 고원 : 선함의 뿌리를 찾아서
“폭력에 저항하고 고집스레 예의를 잃지 않는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을까?” 늘 궁금했다. 하지만 여태껏 어떠한 책이나 강연에서도 명쾌한 답을 찾지 못했다. 선함과 인간다움을 연결 짓는 자체가 어쩌면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이론일 수 있겠다. 혐오 가득한 세상에서 좋음, 착함도 아닌 선함이라는 단어는 장밋빛 유토피아에 가깝다.
전쟁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가장 잘 투영한다. 돈과 권력을 향한 욕망, 종교와 민족에 대한 광적인 믿음, 이념의 충돌 그리고 그것을 부추기는 집단과 사회까지. 인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전쟁이 아닐까. 인류의 역사에는 항상 전쟁이 있었다. 문명의 발달에는 늘 전쟁이 뒤따랐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은 기원전 3천년 경부터 시작된 뿌리 깊은 갈등이며, 7천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제2차 세계대전은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우리나라도 한국전쟁이라는 아픔이 있다.
그렇기에 지난 전쟁을 살펴보는 것은 인류가 지나온 길을 따라가는 것과 같다. <비바레리뇽 고원>은 나치 점령 시대에 난민들을 수용했던 프랑스 한 고원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폭력 대신 사랑을 선택한 사람들을 통해 집단의 선함을 발견한 미국 인류학자 매기 팩슨은 그때 그 장소로 자신을 투입한다.
매기 팩슨은 고통스럽게 질문한다. 상황이 나쁠 때도 선하게 행동하는 공동체가 있을까? 목숨을 걸고 폭력에 저항하면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는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을까? 평화를 갈망하고 그것에 헌신하도록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팩슨은 자그마한 고원 마을 비바레리뇽에서 그 싹을 찾아낸다.
프랑스 중남부 해발 900m에 위치한 작은 고원, 비바레리뇽(Vivarais-Lignon). 수 세기 동안 혹독한 날씨 속에 고립된 채 가난하게 살았던 이 고원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해가며 유대인, 레지스탕스 등을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밥을 먹이고 그들을 교육하고 빼돌려 안전한 스위스로 보냈다. 참여자들은 농부, 상인, 교사, 목동 등 평범한 이들이었다. 폭력의 물결을 거슬러 끝내 인간의 선함을 증명한 것이다.
홀로코스트 당시 이들이 기울인 노력이 어찌나 희귀했는지,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인 ‘야드 바셈’은 열방 의인의 동산에 비바레리뇽을 포함한 단 두 공동체만을 기념하고 있다.
그 배경엔 마을 전통이 있었다. 16세기 이래 이 마을은 개신교도의 섬이었다. 프랑스가 가톨릭 국가인 점을 감안하면 비바베리뇽은 그 자체로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다. 때때로 잔인한 박해의 물결이 마을을 덮쳤고, 주민들은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고난과 극복을 반복하면서 주민들은 스스로 단단해졌다.
자신이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은 타인의 어려움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잘 헤아린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영역에서 외지인들을 폭력에서 보호하는 법을 익혀갔다. 고통 받는 데 익숙했기에 이들은 고통 받는 사람을 지키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밤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 묻지 않고 문을 열어 맞이했다.
조건 없는 환대와 관용 덕분에 비바레리뇽은 폭력이 난무하는 무간지옥 속에서 세계 유일의 낙원이 될 수 있었다. 책에서 매기 팩슨은 난민 어린이를 위한 보호소인 '레 그리용'을 관리하고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 다니엘 트로크메의 거룩한 행보를 집중 조명한다. 마을은 16세기 프랑스 종교전쟁 때는 개신교도들을 보호했고, 프랑스혁명과 뒤이은 공포정치 하에서는 가톨릭 신부를 지켰다. 19세기에는 산업도시에 사는 가난한 아이들을 데려왔고 그다음에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아이들을, 스페인 내전 중에는 스페인의 어머니와 아이들을 데려왔다.
평화로울 때 선행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이나 폭력으로 당장 나 자신조차 추스르기 힘든 상황에서는 타인을 도울 마음의 여유가 없다. 비바레리뇽은 사랑을 배울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갈 곳이 없어 숨어든 난민을 보호한 공동체의 아름다운 전통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문득 ‘선함은 타고나는가’라고 성찰하게 된다. 정작 비바레리뇽 고원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영웅이 아니에요. 그냥 자연스럽게 행동했을 뿐이에요.”
우리는 지금도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유럽에 닿기 위해 목숨 걸고 지중해를 건너는 사람들, 미국 국경을 넘기 위해 북으로 향하는 중남미 사람들 그리고 보호받지 못하는 시리아·우크라이나·팔레스타인 난민들. 고향을 떠나 살 곳을 찾아 나선 이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외국인에 대한 환대는 그 사회의 품격을 말해준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우주의 한 행성에서 부유하는 나그네이고, 본향을 떠나온 이방인 아닌가.
사랑은 북극성이다. 사랑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변수들을 품은 북극성이다. 그러나 사랑은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것, 시도해야 하는 것, 매 순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이 습관이 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품성의 날줄과 씨줄이 되어서 언젠가 바람이 불고 경보가 울릴 때 그 품성이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 p.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