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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Mar 14. 2024

이민자들





어떤 소설은 그냥 작가의 인생 다큐멘터리 같다. W.G. 제발트 작가의 소설이 그렇다. 그의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어디가 허구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이민자들>을 읽는 동안 한 인간이 걸어오고 만나고 경험한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 한 기분 좋은 환상에 빠져들었다. 소설은 허구라는 기본적인 이론조차 무의미해지는 순간,  제발트의 고독한 외침이 들린다. 


유럽에 고향을 두었지만 자의로든 타의로든 그곳에서 다른 나라로 떠난 네 이민자의 이야기가 각각 단편에 담겼다. 첫 번째 주인공은 헨리 쎌윈 박사다. 1인칭 관찰자인 화자는 새 일자리에서 근무를 시작하기 전에 살 집을 알아보다가 헨리 쎌윈 박사의 집에 들르게 된다. 박사는 ‘헤더학교’를 다녔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유대인이다. 화자에게 고향과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놓는다.  


쎌윈이 스위스에 머물던 시절, 등산에 푹 빠져서 등산안내인 네겔리를 만나 친하게 지낸다. 쎌윈은 당시를 자신의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 기억하는데, 전쟁소집령이 내려온 직후 네겔리는 빙하의 크레바스에 빠져 실종된다. 특이하게도 소설은 1914년 여름에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베른의 등산안내인 요한네스 네겔리의 유골이 칠십이 년 만에 오베라르 빙하에서 발굴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사진으로 싣고 있고, 이 기사는 실재한 사건이다.  


작가는 이름도 없이 파묻힌 역사의 개별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그들을 알고 있는 여러 사람의 증언을 녹취하고 자료를 조사하고 사진을 수집할 뿐만 아니라 직접 그 현장을 여행한다. 소설 곳곳에 배치된 흐릿한 사진들은 기억 속에서 방금 끄집어낸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두 번째 주인공은 화자의 독일 고향 마을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파울 베라이터이다. 온갖 고통을 겪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꿈에 그리던 고향에서도 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멸시를 당한다. 참담한 현실과 맞닥뜨린 파울 베레이터는 결국 자신의 꿈을 접어야 했다. 유대인 차별이 덜한 프랑스행을 결심하고 기차를 기다리다 파울은 열차가 달려오는 철로에 뛰어들어 젊은 생을 마감한다. 


영국에 이주해 정체를 숨기고 살아온 동유럽계 유대인 쎌윈 박사, 유대인으로서 독일을 떠나왔으나 끝내 고향을 등질 수 없었던 파울, 미국으로 이주한 동성애자 아델바르트, 학살을 피해 이민자의 항구 도시 맨체스터에 자리를 잡은 화가 페르버. 제발트 그 자신으로 보이는 화자는 이렇게 소설을 통해 인간이 만들어낸 극단적 상황과 야만의 역사, 이로 인해 희생되는 인간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한다. 이민자들의 삶을 파고들며 화자와 등장인물 간 경계를 넘나들고, 생애사에 가깝도록 내밀한 이야기를 끈질기고 섬세하게 펼쳐놓으면서 이민자들 특유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그리움, 끝없는 불안감 같은 정서를 애절한 구조로 표현한다.  


사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독특한 작법 때문에 그의 소설 속 작은 소재도 흘려보낼 수 없다. 하찮은 도시의 지명이나 사람의 이름, 영수증이나 팸플릿, 전시회에서 보았던 그림이나 사진 등이 얽혀있는 현실세계 비밀의 문을 여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주인공들이 우연인 듯 나비채를 든 사람들과 자주 조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작가가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집어넣은 장치로 보인다. 또 아무런 설명 없이 누군가의 사진첩에서 꺼내온 것만 같은 흑백사진이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데 이 또한 분명한 의도가 있다. 모든 단서들이 어느 한 시절의 세계를 말없이 이루고 있었다가 어느 날 나비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고 지금 우리가 그들의 부재를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특히 마지막 주인공 막스 페르버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작가의 마지막 장편인 <아우스터리츠>를 연결 짓게 된다. <이민자들>과 <아우스터리츠> 모두, 과거의 시간에 관한 회상이며, 사라져버린 존재들을 어둠 속에서 더듬어가는 과정을 다룬다. 역사는 기억을 통해 찾아가는 과정임을 암시한다.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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