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3.1절, 일본 지배에 항거하며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3.1운동을 기념하는 날이다. 특히 올해는 105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선열들을 기억하며 역사 도서 한 권을 소개한다.
인왕산 기슭 서울 종로구 행촌동 1번지에는 아주 특별한 집이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행복한 마음의 궁전’이라는 의미의 서양식 붉은 벽돌집 ‘딜쿠샤(Dilkusha)’이다. 미국 AP통신 특파원으로 3·1 독립선언서를 처음 보도한 앨버트 테일러가 1923년에 지었다. 행주대첩으로 잘 알려진 권율 장군의 집터로, 마당에 470여년이나 된 보호수 은행나무도 권율 장군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은행나무 마을’이라는 뜻의 행촌동 지명도 그래서 지어졌다.
<딜쿠샤의 추억-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1번지 아주 특별한 집>은 딜쿠샤가 스스로 화자가 되어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테일러 가족이 살던 이 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리고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빼앗긴 주권을 찾으려는 조선인을 외면하지 않았던 앨버트가 어떻게 한국 민족대표 33명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1919년 3·1 운동을 세계에 알렸는지 찬찬히 들려준다.
앨버트의 아내 메리는 3·1운동 하루 전날 아들 브루스를 낳았는데, 간호사들이 들어와 메리가 누워 있던 침대에 종이 뭉치를 숨기고 사라진다. 다행히 일본 경찰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종이 뭉치는 앨버트에 의해 해외에 알려지게 된다. 바로 3·1 독립선언서이다.
남편 앨버트는 곧바로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로 시작하는 독립선언서 전문을 세계에 알렸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독립만세운동이 알려지게 된다. 앨버트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상황과 독립운동에 관심이 남달랐고, 관련 기사도 많이 썼다. 조선총독부는 1941년 독립운동을 도왔다는 혐의로 앨버트를 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했다. 부인 메리도 가택연금을 당한다. 풀려난 후 부부는 미국으로 강제 추방을 당하게 된다.
이후 딜쿠샤는 폐허로 변해 ‘귀신이 나오는 집’으로 불렸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앨버트는 1948년 사망했고,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대로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원에 안장됐다.
“네가 어디를 가더라도 언젠가는 꼭 돌아와야 할 너의 집은 바로 이곳이란다.” 미국으로 떠나며 메리가 아들 브루스에게 한 말이다. 딜쿠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브루스는 87세의 할아버지가 돼서야 딜쿠샤를 찾아냈다. 그의 방문으로 집 이름과 역사적 의미가 마침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2017년 8월 문화재청은 딜쿠샤를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지정했고, 복원공사를 거쳐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나는 남산이 보이는 이 언덕 위에서 전쟁의 흔적을 지워 가는 서울을 지켜볼 수 있었어. 폐허가 되었던 도시는 빠르게 복구되기 시작했지. 거리는 파헤쳐졌다 덮어지기를 반복했고 높은 건물들이 서울을 뒤덮기 시작했단다. - p. 35
딜쿠샤의 추억〉을 쓴 두 저자 김세미, 이미진은 작가와 프로듀서로 오랫동안 딜쿠샤의 이야기를 좇아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그림책으로 펴냈다. 한 개인의 집이라고 부르기에는 딜쿠샤의 역사적 가치가 무척 크기 때문이다.
앨버트와 메리, 브루스의 바람이 따뜻한 온기로 돌아와 이제 딜쿠샤는 더 이상 귀신의 집이 아닌 역사 현장으로 남아있다. 오래전 우리 민족에게 뻗었던 선한 손길처럼, 봄이 오면 뜰을 내어주고 겨울이 오면 따뜻한 온기를 품어줄 것 같은 그곳에, 다시 딜쿠샤의 시간이 쌓이고 있다. 앞으로는 ‘기쁜 마음의 집 딜쿠샤’로 남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 한국에 가면 서울 종로구 행촌동 1번지 아주 특별한 집을 찾아가보고 싶다. 여러분도 그곳에 있을 새 희망을 반드시 찾아보시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