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 깔깔거리며 폭 빠져서 본 드라마가 있다. <유미의 세포들>이다. 동명의 웹툰을 드라마로 그대로 재현했다. 줄거리를 말하라면 그저 '주인공 유미가 연애하는 과정에서 겪는 이야기'가 전부일 정도로 단순한데 묘하게 보면 볼수록 유미를 응원하게 된다. 나도 다 겪은 아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30대 직장인 유미의 뇌 속에는 수많은 세포들이 있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는 모두 세포들이 의견을 모은 결과다. 응큼 세포, 사랑 세포, 이성 세포, 감성 세포, 출출 세포 등 세포들의 목소리로 유미의 감정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이랑 비슷한 듯 다르다.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미워할 때 우리 안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유미의 세포들>은 이런 질문에서 시작한다. 단순해 보이는 청춘 멜로의 양상들이 이 세계관 속에서는 블록버스터처럼 아찔하다. 유미의 프라임 세포는 시시때때로 바뀐다. 유미가 허기질 땐 출출 세포가 거대해지고, 유미가 사랑을 할 땐 사랑 세포가 무적이 되어 커다란 출출 세포까지 제압해버린다.
유미가 3년 전 연애를 끝냈을 때 유미의 세포마을에는 홍수가 들이닥쳐 모든 이웃 세포들을 휩쓸어 버린다. 사랑세포는 그 후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3년째 깨어나지 못한다. 그런 사랑세포가 눈을 뜬 건, 유미 앞에 새로운 남자가 나타나면서다. 그에게 마음이 있지만 자꾸만 그 사이에 끼어드는 루비 때문에 관계가 엇갈리던 유미가 드디어 용기내 데이트를 신청하는 장면에서는 사랑세포가 오랜만에 의식을 찾는 설정으로 나온다.
내 안에는 어떤 세포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까 상상해보자. 일을 할 때는 완벽주의 세포와 집중력 세포가 세계를 지배한다. 완벽주의 세포는 기특하게 그럴듯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만 언제나 그 대가로 나를 갉아먹는다. 그때 피곤 세포와 수면 세포가 고개를 든다.
처음에는 까르륵 뒹굴면서 보다가 유미가 웅이랑 갈등하고 오해할 땐 가슴 아파 혼났다. 어느새 유미의 친구가 됐다가 때론 내가 유미가 됐고, 그렇게 유미는 그 자체로 나에게 힘이 됐다. 특별함을 꿈꾸지만 특별하지 않고, 강하기를 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유미의 모습이 유독 애틋하다. 유미는 카타르시스를 주는 캐릭터라기보다는 공감하는 캐릭터라서 친근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유미의 세포들>을 쓴 작가는 이동건. 남자 작가이다. 데뷔작인 <달콤한 인생>에서도 동시대 젊은 여성들의 내밀한 심리를 너무나 섬세하게 그려내 남자의 탈을 쓴 여성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던 그는, 이번 <유미의 세포들>에서 30대 여성의 감정과 욕망을 담당하는 세포들을 솔직하게 그려냈다.
만화로서는 기발하지만 자칫 젠더 감수성 논란으로 번질 수 있는 소재다. 이동건 작가는 이성애자 남성으로서 구애 대상인 여성과 싸우기보다는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한다. 여자들에게 인정이든 사랑이든 받고 싶다면 여자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게 맞다고 판단해 유미 캐릭터를 더 입체적으로 들여다봤다. 그 어느 때보다 작품 속 여성의 묘사에 대한 여성들의 평가가 엄격해진 분위기 속에서도 오히려 동시대 여성 독자들의 지지와 호응을 받은 이유다.
<유미의 세포들>에서 남자 주인공은 따로 없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 명이다. 유미 인생은 유미의 것이므로 인생의 주인공은 유미이다.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 친구, 동료는 모두 조연이다. 이들과 살아가는 과정에서 세포들이 벌이는 소동이 꽤 유쾌 발랄하다. 드라마틱한 만남이나 운명적인 사랑 같은 것도 없는 너무나 단조롭고 소소한 스토리지만, 세포마을에서 이 소소함은 여러 세포의 스릴 넘치는 사건들이 된다.
내가 뭘 싫어하고 뭘 좋아하는지 확실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경험해보면 아닐 때가 더 많다. 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꽤 많다니까. - 261화
그런데 한없이 달달하고 매력 넘치는 <유미의 세포들>을 한발 물러나 바라보면 지금 청춘들의 씁쓸한 초상이 그려진다. 유미는 작가가 꿈이었지만 지금은 평범한 회사 회계팀에서 일하고 있다. 한창 경력을 다지고 성장해야할 30대 초반의 나이지만 웹툰에서는 이상하게도 성취나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과감한 도전과 모험을 포기하고 단순하게, 편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요즘 MZ세대 특징이다. 현실의 벽에 굳이 맞서느니 피하는 걸 선택한 그들에게 삶은 블록버스터처럼 거창하게 일에 도전하고 성취해내는 세계가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더더욱 유미의 연애 세계를 마치 블록버스터처럼 느끼며 대리만족 하는 건 아닐까. 세포세계의 희로애락을 엿보며 우리는 현실 가능한 사적인 영역에 대한 관음증 유혹에 빠진 건 아닐까 되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