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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Oct 16. 2024

마치 우울하고 예민한 내가 죽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다들 말하잖아. 사람은 누구나 다 힘들다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만큼 우울을 얕잡아 보게 만드는 말도 없을 거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정신의학과에 가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우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 작은 병원은 정말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사람들로 빽빽했다. 그냥 일반적인 병동 같았다. 대기하던 사람들은 모두 길거리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 p. 35 


마음병은 그런 것이다. 다리가 부러지면 깁스를 하고, 피부가 까져서 피가 흐르면 반창고를 붙인다. 우울은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가 없어 쉽게 알아보지 못한다. 차라리 어디 표시라도 났더라면 병원에 발을 들이기가 더 쉬웠을지 모르겠다. 


<마치 우울하고 예민한 내가 죽기라도 바라는 것처럼>은 정하 작가가 겪는 우울을 차분하게 기록한 에세이다. 극복기나 체험수기가 아니다. 대부분의 우울증 환자들이 그렇듯 이 증상은 완치가 없이 꾸준한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책을 완독한 독자들 사이에서는 '더 우울해졌다', '기대한 힐링 메시지가 아니다'는 후기가 오갔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해맑은 응원가가 아니어서 오히려 좋았다. 현실을 솔직하고 정확하게 보여주는 와중에 지나치게 자극적이지 않아서 더 공감이 간다. 누구나 내면 깊은 곳에는 우울과 불안이 존재하는데 그 감정을 들여다보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고 위로받는 기분이랄까. 


이 부분을 고려한 듯 정하 작가 역시 시작점에서 이 이야기는 제주도로 떠난 우울증 환자가 자신의 우울을 극복하는 따뜻한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고 미리 밝힌다. 오히려 삶은 우울의 연속이라고 말하는 이야기다. 우리는 각자의 우울을 껴안고 살아야 한다. 그 우울이 어떤 생김새일지라도 회피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정하 작가는 세상에는 이런 하찮은 우울도 있다고 외치고 있다.     


우울증 환자에 대한 흔한 편견 중 하나는 그들은 특이할 것이라는 인식이다. 당장 드라마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소리 지른다든가 허공에 대고 대화를 나눈다거나 혹은 머리를 박고 몸을 찌르는 자해를 하는 사람들. 그 정도는 돼야 정신병이라 부를 수 있는 줄 알았다.  


그에 비해 정하 작가의 이력은 평범했다. 자국 하나 없는 이 새하얀 팔목으로, 고작 이 애매한 우울을 이고 가는 게 염치없게 느껴질 정도였다.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언제든 죽어버리길 바랐다. 작가는 어이없게도 신체의 고통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라, 죽을 때 너무 아프겠지 싶어 제 손으로 끊어낼 용기가 없어서 용케 살아 있었다. 그래서 나가는 매 순간 기도했다. 오늘은 제발 어떻게든 죽게 해 달라고. 매일 현관문을 나서며 죽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는 멀쩡히 걸어 집 문턱을 넘으면서 또 살아있음에 울곤 했다. 


작가는 마음껏 우울하기 위해 제주도로 도피했다. 단절과 고립만큼 내면을 돌아보기 최적화된 환경은 없을 것이다. 제주도 곳곳에서 보이는 야자수의 꽃말은 부활이라고 한다. 우울한 사람은 이 야자수를 바라보며 죽어버려도 다시 살아나면 어쩌나 걱정을 한다. 그런데 이내 팔도 눈도 다리도 귀도 솟아나는 기현상을 체험한다. 그제야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게 들렸다. 마주하지 못했던 내면 우울을 마주한 순간이다.   


누구나 때로 우울한 시기를 겪지만, 그것을 직면하려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우울감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우울을 인정한다 해도 그 원인을 찾아내는 길은 여전히 함정으로 가득하다. 자신에게 과도한 연민을 베풀어 타인의 고통에 무감해지거나, 자신의 우울한 상태에 중독되기 쉽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 찾게 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은 쉽게 얻기 어려운 만큼의 가치가 있다. 


정하 작가가 제주도 한 달 살이를 한 목적은 우울을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를 직면하기 위함이다. 한 달은 우울을 껴안은 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탐구하는 시간이었다. 우울 탐험이 반드시 부활로 이어지는 건 아닐 테지만, 마음속에 폐허를 만들어내는 우울의 본질을 짚어보았다는 점에서만큼은 삶을 관통하는 의미를 갖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2021년에 나왔다. 유난히 춥고 어둡던 시기에 작가는 우울을 지켜보기 위한 탐험에 나섰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현재, 작가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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