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기분이 좋아진다. 어린왕자가 오후 네 시를 기다리며 마음을 두근거렸듯, 나 역시 매년 가을을 손꼽아 기다린다. 나에게 가을은 오후 세 시다. 곧 쏟아질 풍성한 공연과 전시를 떠올리면 이 계절은 새로운 예술을 만나는 특별한 시간이 된다.
지난 주, 나는 책으로 먼저 그 설렘을 맛보았다.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한국 미술사를 가르치고, 수많은 전시를 기획해온 이정실 교수가 고동연 평론가와 함께 펴낸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Art in Context, 1950–Now>다. 한국 현대·동시대 미술을 다룬 영문 교재가 드물었던 만큼, 이 책은 지난 70여 년의 흐름을 사회·정치·문화의 맥락 속에서 촘촘히 짚어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정실 교수는 “한국 미술을 서구 사조의 변형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며,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미술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이 책은 한국 현대미술이 세계 미술사와 연결되는 지점을 글로벌 모더니즘(Global Modernism)으로 조명한다. 그래서 책에는 한국 사회가 겪어온 굴곡과 변화 속에서 미술이 어떻게 말하고, 또 어떻게 침묵했는지에 대한 여정을 짚어낸다.
책은 각 장마다 시대적 흐름과 대표 작가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단색화 장에서는 전통적인 한국 회화의 미감을 현대 추상으로 재해석한 작가들의 실험을 소개한다. 김구림의 대담한 잔디태우기 퍼포먼스, 이중섭의 서정적 정서를 담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민중미술 장에서는 1970~80년대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갈등 속에서 예술이 저항과 메시지를 담는 방식을 본격 탐구한다. 페미니즘 미술과 여성 작가 그룹 장에서는 역사적 트라우마와 사회적 억압을 예술로 해석하며, 여성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서사를 만든 사례가 소개된다. 미디어 아트와 디지털 아트 장에서는 백남준과 현대적 전자·디지털 실험을 소개하며 한국 현대미술이 국제적 무대에서 주목받는 맥락을 설명한다.
책 속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작품 하나하나가 시대의 증인이자 한국적 정체성을 탐색하는 기록임을 느낄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서구 현대미술과 달리 한국 미술이 끊임없이 정신성과 메시지를 추구해왔다는 저자의 통찰이다. 급격한 산업화와 세계화 속에서도 작가들은 단순한 모방이 아닌 한국적 서사를 담아내려 애써왔다. 정정엽 작가가 억울함과 사회적 불평등을 예술로 풀어낸 대표 사례다.
이정실 교수는 예술이 어떻게 개인적·사회적 경험과 맞닿아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냈는가에 주목한다. 교수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챕터가 민중미술인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억울함과 차별을 예술로 승화시켜 공감과 위로를 만들어낸 힘 말이다.
책을 통해 후배 신진 작가들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유행과 상업성에 휘둘리지 말고 멀리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라.”는 조언이다. 단기적 유행을 좇기 쉬운 세계 미술 시장 속에서 진정한 예술은 언제나 폭풍 속에서도 피어나는 생명처럼 강인하게 살아남았다. 그런 작품들은 사회적 맥락과 메시지를 담아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통 회화와 민속신앙, 풍속화, 민화 등 다양한 전통 요소를 차용하되 자기 식으로 재해석해 독자적 위치를 만드는 일은 작가 본인의 몫일 것이다. 그때 미술은 더 이상 한 시대의 장식물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가장 예민하게 포착한 기록이 된다.
책을 읽자 마치 한 편의 대하사극 시리즈를 감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미술이 결코 박물관 속에 갇힌 그림이 아니라 시대의 격변을 담아내는 언어임을 절감했다. 더불어 한국 미술이 세계인의 이목을 끌게 된 이유와 그 한계까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
오래 전 서울의 작은 화랑에서 보았던 작품이 떠오른다. 그때는 단지 ‘난해하다’고만 느꼈던 그림이 이제는 시대의 맥락 속에서 달리 보인다. 책이 전하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미술이 개인의 감각을 넘어 사회와 역사를 품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
시카고대학교 우훙 교수가 “현대미술에 관심 있는 이들이 오래도록 기다려온 책”이라고 평했듯, 이 책은 연구자와 애호가 모두에게 새로운 기준점이 될 것이다. 해외 독자에게는 한국 미술을 이해하는 길잡이가 되고, 한국 독자에게는 우리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기억을 되돌아보는 거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