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귀에 오밀조밀한 눈코입을 가진 귀염둥이 ‘베니’. 얼굴도 귀엽지만 베니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오동통한 엉덩이다. 이 앙증맞은 캐릭터 ‘베니’를 보고 있노라면 하얀 털뭉치 같은 갓 태어난 강아지가 떠오른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구경선 작가가 ‘베니’를 탄생시켰다. 작가는 어릴 때 열병을 앓아 청력을 잃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신을 대신해 세상의 소리를 들어달라고 귀가 큰 토끼 ‘베니’를 그렸다. 말하자면 베니는 작가의 분신이자 이상형인 셈이다.
그런데 이제 그녀의 시력에도 문제가 생겼다.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았는데, 시야가 점점 옅어지다가 결국 시력을 잃게 되는 병이다. 현재로서는 치료법도 마땅치 않아서 헬렌 켈러처럼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게 된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녀의 책은 명랑하다.
<그래도 괜찮은 하루>(사진)에 등장하는 ‘베니’는 항상 웃고 있다. 아직 완전히 안 보이는 상황도 아니고, 여전히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무엇이 슬프냐고 반문한다. 그녀는 언제가 될지 모를 깜깜한 날에 대비해 25가지 버킷리스트를 만들었다. 우유니 소금사막에 가서 누워보기, 친구 찾기, 엄마에게 미역국 끓여드리기 같은 지극히 평범한 소원들이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누구나’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아직 혼자서 할 수 있을 때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이 조급하다. 이 책은 그녀가 버킷리스트들을 하나씩 이루어가는 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담고 있다.
다소 엉뚱한 소원도 있다. ‘돌고래와 헤엄치기’ 세상에 신나고 재미난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돌고래와 헤엄치는 것이 소원일까.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이 떨어지는 밤바다에서 돌고래에게 몸을 맡기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돌고래가 말을 건넸다. “소리도 빛도 없어도 온전히 모든 감각으로 느껴보라고. 아직 포기하지 말라고.” 그 순간 작가에게는 그냥 돌고래체험이 아니었다. 희망을 발견하고 위로를 받는 순간이었다.
청력을 잃었을 때에는 그래도 상황이 좀 나았다. 말 대신 글과 그림으로 충분히 소통이 가능했다. 그녀가 만난 사람들, 풍경들을 종이에 담아내면서 세상과의 벽도 조금씩 허물었다. 청각장애가 익숙해질 즈음 이번에는 망막색소변성증이 그녀를 괴롭혔다. 결국 다니던 애니메이션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긴 방황을 겪어야 했다. 상황은 최악이었어도 생각보다 크게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 아직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완전히 안 보이게 된다 해도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감각,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손이 남아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보인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선물 같다고 한다. 예전에는 눈 뜨면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여겨졌지만 이제 그녀에게 보이는 것들은 하나하나 소중하고 감사하다. 이렇게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소통을 이어가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자신의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녀의 시력이 언제까지 힘을 낼지는 모르겠다. 남은 시간이 얼마가 될지 모르기에 매일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녀는 ‘내일 하지 뭐’ 하고 미루는 법이 없다. 내일이 되면 당장 안보일 수도 있으니까. 자고 일어나 아침에 눈을 뜨면 아직 보인다는 사실이 행복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 하늘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큰 기적이다.
장애조차도 축복이자 기회라고 말하는 그녀 앞에서는 어떤 것도 문제되지 않아 보인다. 소리를 잃고 빛을 잃어가면서 남아있는 감각들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그 감각들을 몇 배나 더 발달시킬 수 있었다. 그저 희망을 잃지 않고 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이 된다는 것에 기뻤다. 무엇보다 그녀 대신 소리를 들어주는 토끼 ‘베니’와 함께라면 앞으로 겪게 될 어두운 세상도 두렵지 않다.
늘 가지지 못한 것에 아쉬워했었다. 하늘이 나만 외면하는 것 같다고 억울해했었다. 구경선 작가가 쓴 <그래도 괜찮은 하루>를 읽고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그녀의 긍정에너지가 내 마음까지 훈훈하게 덥혀줬다. 모든 것에 ‘최고’, ‘제일’일 필요는 없다. 별일 없는 오늘이야말로 꽤 괜찮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