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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금언니 May 11. 2016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이유

반복되는 일과 일상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이들에게

“ 이거 하나 인가요? 오천 원 입니다. 적립카드 있나요? "
 집 앞 마트를 갔더니 계산을 담당하는 직원이 바꿔있었다. 교육생이라고 명찰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신입직원 교육 중임이 분명했다. 그 직원에게 계산을 끝내고 돌아오는 데 기분이 좋아진다. 웃으며 눈을 쳐다보고 말을 건네고, 말투가 꽤나 공손했고 무엇보다 열정이 가득한 느낌이 좋았다. 나도 저랬을 때가 있었지……하며 웃음이 나온다. 직장생활을 할 때 난 어떤 직원이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

사회초년생 시절 나는 야망 넘치는 여자였다. 창창하던 20대 시절은 그랬다. 직장에 들어왔으면 임원까지도 꿈꿔야 하는 거 아니냐, 하며 큰소리를 쳤을 정도였으니. ‘ 원하지 않는 일을 지금은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내가 꿈꾸던 일을 이 직장에서 할 수 있을 것이야. 그러려면 오늘도 최선을 다하자. 견디자. '

 

연신 나를 달래가며 눈 앞에 쌓이는 일들에 열정을 불살랐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눈 앞에 일을 처리하기도 버거웠다. 그리고 퇴근해서는? 지금 생각해도 기특하다. 언젠가는 나의 전투력을 배가시켜줄 비장 무기인, 자격증과 석사학위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 냈다. 하지만 그 모습은 흡사 걷는 발 앞에만 시선을 둔 채 걷는 모습이랄까?   


그러다가, 직장 경력 5년차 접어드니 일은 손에 익었고 직장에서의 하루가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31살의 어느 봄날이 생각난다. 난 그때 퇴근길 버스에 몸을 맡기고는 졸고 있었다. 퇴근하는 버스에서는 왜 그렇게 잠이 쏟아지는지…… 옆에 폭탄이 떨어져도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아 놀라울 따름이다. 기사님이 거칠게 몰아대는 버스 흔들림에 맞춰 내 머리는 춤추고 있었다. 급기야 급하게 서 버린 어느 정류장에서 머리를 창문에 박고서야 잠에서 깼다. 식상한 레퍼토리긴 하지만, 로맨스 드라마에는 이런 상황에 여주인공을 귀엽게 내려다 보고 있는 남자 주인공이 샤랄라……등장한다. 그러나 현. 실. 에. 는? 한심하게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중학생과 눈이 마주칠 뿐. 도착 정류장을 지나지는 않았는지 두리번거리며 창 밖을 바라 봤을 때, 그. 때.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하늘 하늘 눈처럼 흩날리고 있는 벚꽃들. 불광 천에 따라 핀 벚꽃 잎들이 바람에 날리며 동화 속 에서 나올 법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도착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뭐에 홀린 듯 버스에서 내려 나는 걷기 시작했다. 31살, 나는 입사 7년차이었고 남자친구도 없었고 취미도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반복되는 일상과 일이 싫고 지겨워서 아침에 일어나기조차 두려울 정도였다. 그때 처음으로 의문을 품었다. 왜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매너리즘을 극복하는 방법은 뭘까?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  - 알베르 카뮈 Albert Cam

 일에 무감각해지며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매 순간 인정 받고 사랑 받을 수는 없다. 

단순히 돈만 벌고자 직장을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통장에 스치듯 안녕(?) 하는 월급, 그것 하나 때문이라고? 그렇게 말은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깊은 내면에는 다른 동인(動因)들을 발견할 것이다. 성장과 성취의 기회, 그리고 타인으로부터의 인정. 이것들을 위해 직장에 다니지 않는가?  


오히려 인간은 처음부터 흠집투성이의 존재이다. 인간은 타인에게 의존한다. 인간은 타인의 사랑과 인정을 갈망한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애정 관계에서뿐 아니라 일에서도 탈진할 때까지 자신을 혹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런 욕망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타인과 관련이 있다.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좀더 노력하면 가능할 거란 희망으로 인정에 대한 끝없는 야망을 불태운다.  - 스페냐 플라스푈러 저(독일 철학자),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타인의 인정이라 함은 직장 내부적으로는 상사나 동료, 조직의 인정을 말할 수 있다. “ 김대리, 수고했어. 열심히 했어! “ 프로젝트를 끝낸 회식 자리에서 팀장님으로부터 이 말 들었을 때, 가슴 뜨거워 진 적 있을 것이다. 너 열심히 하고 있어. 너 같은 부하직원을 둬서 나는 감사하구나. 이런 칭찬과 격려 들었을 때 우리는 넓은 세상이 가슴에 들어온 듯한, 벅찬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포상과 승진 같이 조직이 주는 인정. 당신은 듣고 있는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소위 간판 있는 기업에 입사했을 때 부모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이 기차 통을 삶아 먹을 듯한 우렁찬 목소리로 친구분들과 통화하는 모습을 본 적 있을 것이다. “ 우리 딸이 이번에 땡땡 회사에 들어갔잖아!!! 땡땡 회사 알지? 대한민국 사람 중에 땡땡 회사 못 들어본 사람 없지?” 본인 또한 대기업 사원 증을 목에 거는 순간 가슴이 펴지며 가슴 한 곳에서 올라오는 뭉클한 자긍심을 경험했을 것이다.

 

오늘도 인정 받고 승진 하고 싶어서 야근에 온몸을 불사르는 직장인들을 수없이 목격한다. 직장인 10명 중 8명이 ‘번 아웃 증후군’에 시달린다고 한다. 나 또한 상사나 조직에 인정 받기 위해 무던히도 애 썼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처지(인정 받고 싶어 하는) 동료들과 경쟁해야만 했다. 인정 받기 위해 노력하고 치열히 경쟁하지만, 그걸 조직과 상사가 알아주지 않았을 때 어떤 기분이 드는가? 짝사랑 하는 기분 든다. 계속 짝사랑만 하면 지치기 마련이다. 짝사랑만 오래 할 수 없는 법. 인정 받고 싶은데 받지 못하면, 그건 마음이 아픈 일이다. 그러면 점점 열정을 잃어 간다.  


그리고 인정을 받는 다고 해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매 순간 인정 받고 사랑 받을 수는 없다. 동료가 잘할 때도 있고, 노력해도 성과나 나오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조직에서 인정 받아서 초고속 승진을 하여 부장, 임원이 되어도 한 순간의 실수로 퇴직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인정받고 싶어도 받지 못 할 때, 그리고 그 인정이 늘 한결 같지 않다는 사실에 허무주의에 빠지기 된다.

 두 번째, 부품이 된 기분이야!  


동료들이랑 서로 농담으로 말한 적 있다. 우린 그냥 부품이잖아, 위에서 높은 분들이 하라고 하면 하는 거지. 웃으며 말하지만 속이 쓰려온다. 알랭드 보통은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말했다.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다. 분업이 가져온 폐해라고 말한다.   


일이 의미 있게 느껴지는 건 언제일까?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자아내거나 고통을 줄여줄 때가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 이기적으로 타고 났다고 생각하도록 종종 배워왔지만, 일에서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행동하려는 갈망은 지위나 돈에 대한 욕심만큼이나 완강하게 우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중략)  
진짜 문제는 비스킷을 굽는 것이 의미가 있느냐가 아니라, 그 일이 5천명의 삶과 6개 제조 현상으로 계속 확장되고 분화된 뒤에도 여전히 의미 있게 여겨지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일은 오직 제한된 수의 일꾼의 손에서 활기차게 이루어질 때에만, 그래서 그 몇몇의 일꾼이 자신이 작업 시간에 한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상상하는 순간에만 의미 있게 보일 수도 있다.  - 알랭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이 글귀들을 읽고 고맙게도 위안을 느꼈다. "그래, 내 탓이 아니다. 회사나 제도의 잘못이야."

이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이런 위안 뒤에는 지겹고 치사한 일터에서의 일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위안과 위로는 한 때뿐, 하루 하루는 지루하게 이어졌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위안이 아닌, 지겨움을 이겨내고 일터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방법이었다. 일의 매너리즘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31살 봄에 이 질문을 가슴에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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