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테 Mar 16. 2021

산티아고 순례길 day 7

쿨가이가 나에게 전해주고 간 선물들


Help us to build this rest area. thanks.


6시 반쯤 눈이 떠졌다.

어제 샀던 1유로짜리 땅콩을 아침으로 먹고서 7시에 길을 나섰다.


왼쪽에는 가로등, 저 멀리 앞 쪽에는 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쌀쌀한 새벽 공기와 깜깜한 밤하늘의 수많은 별을 가만히 감상하면서 걸었다.

하루를 즐겁게 시작하기에는 너무나도 충분했다.


어둑한 새벽에 걸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화살표와 비석을 중간중간 잘 확인할 것!

딴 길로 새 버리면 안 되니까.


에스테야 16.1km

1시간쯤 걸었더니 어느새 날이 환해졌다.

대자연 이틀째라서 그런지 오늘따라 유난히 땀이 많이 많이 났다. 아 힘들어.


오늘의 목적지인 에스테야까지 16km가 남았다는 표지판이 나왔다. 벌써 5km 정도를 걸어왔구나.

표지판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걸어왔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가면 되는지를 알 수 있다는 건 꽤나 든든한 일이다.

뒤를 돌아보니 오늘도 역시나 해가 아름답게 떠 있었다. 이미 환해진 지 오래인 줄 알았는데, 다시금 일출을 보는 듯했다.

어느덧 9시가 되었고, 드디어 첫 번째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양이들을 많이 마주쳤다.

창문에 앉아있는 고양이, 길에 서로 장난치며 놀던 고양이들도. 귀엽기도 하고, 문득 나도 편히 집에서 뒹굴면서 안락함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꽤나 조용한 마을 골목길을 걸으며 혹시 쉴만한 바르가 있나 싶었는데, 걷다 보니 마을이 끝나버렸다. 아쉬움도 마을도 뒤로한 채 계속 걸어야지 별 수 있나.


걷다 보니 꽤나 귀여운 길이 등장했다.

오른쪽에는 올리브 나무들이 가득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귀여운 문구와 함께 작은 돌들이 쌓여있었다.


Help us to build this rest area. thanks.

휴식 공간을 짓는 걸 도와줘. 고마워.


외국 사람들의 이런 면들이 참 매력 있는 것 같다. 힘들어서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데, 굳이 이런 소소한 장난과 재미를 자신이 가는 길에 배치한단 말이지.


누군가의 눈에는 쓸데없어 보일지 몰라도 사실 따지고 보면 아무나 못 하는 일이지- 싶다.

무엇보다 본인을 비롯하여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작은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산티아고 676km

이 길을 걸은 지도 일주일이 되었고, 산티아고까지 676km가 남았다. 사실 내가 걸어온 거리도, 남은 거리도 가늠이 잘 안 간다. 그저 걷는 거다.

올리브 나무가 가득한 곳으로 들어왔다. 솔직히 처음에 이게 올리브 열매인지도 몰랐다.


어릴 때도 콤비네이션 피자를 시키면 꼭! 올리브는 빼놓고 먹었는데. 더군다나 내가 본 올리브는 온통 새까만 검은색이었으니까. 올리브 열매가 이렇게 귀여운 연두색일 줄은 몰랐다!


나뭇가지에 문득 누군가 편지를 달아놓았다.


My darling.

How live strugged to get here, but you are in my heart + keeping me going. Love you so much.


왠지 모르게 절절하면서도 귀여운 편지였다.

자리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발목도 돌려주고, 어깨도 스트레칭하면서.


순례길을 걸으면서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휴식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는 한다. 휴식은 멈춤이 아니라,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다.


수험생 때도 늘 하루에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지 분량과 시간을 빼곡히 넣고는 했으나, 미처 휴식은 계획에 포함시키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늘 휴식과 놀이, 즐거움은 자제해야 하는 것이며, 성공과 반대되는 말이고 사치라고 배우고는 했으니까.


나는 그 말이 이제는 명백히 틀린 말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휴식이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힘도 얻을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낙서가 생각난다.

Help us to build this rest area. thanks.


언제나 몸이 신호를 보내올 때는 꼭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줘야지! :)



쿨가이가 나에게 주고 간 선물들


어떤 외국인 아저씨가 무화과 열매를 나무에서 따더니, 나에게 건네주고선 성큼성큼 앞서가버렸다.


"땡큐, 그라씨아스!"

사실 이것도 처음에 무화과인 줄도 몰랐다.

이게 뭐지? 뭘까?- 하면서 갸우뚱거리다가 궁금해서 손으로 까보기 시작했다.

어느새 입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렇게 아리송한 열매를 직접 눈으로 보고 먹으면서 몸으로 알아간다는 게 너무 재밌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타인이 건네준 열매라니!

게다가 무화과는 정말 꿀맛이었다.


또 먹고 싶어서 나무들마다 눈여겨보았는데 찾지는 못했다.

오늘도 만나는 터널.

이제는 터널을 지날 때마다 다시금 되새겨보고는 한다.


'터널은 언제나 끝이 있는 법!'

그렇게 또 얼마나 걸었을까?


아까 성큼성큼 앞서갔던 외국인 아저씨가 저 멀리 나무에서 또 무언가를 따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갑자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저씨 옆을 지나가며 "올라" 인사를 하는데, 이번에는 호두를 손에 쥐여주고 선 또 성큼성큼 걸어가버렸다.

쿨가이.

웃기기도 하고, 그 마음이 또 고맙기도 해서 그의 빠른 발 템포만큼이나 나의 즐거움도 덩달아 상승했다.


무언가를 주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어때, 고맙지?' 혹은 '어때, 나 괜찮은 사람이지?' 정도는 웬만큼 느껴지곤 하는데, (의무감이나 본인이 원하는 바가 있어서 주기도 하고. 뭐 어쨌든.)

그에게는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쿨함이 굉장히 멋지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게 가능한 거구나-를 깨닫는 순간이지 않았나 싶다.


늘 누군가에게 받은 만큼 똑같이(혹은 그 이상으로) 돌려주어야 한다고 배웠다.

관계 속에서 그렇지 못하면 미숙한 것이고 열등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더더욱 타인에게 무언가를 받으면, 고마움보다는 죄책감이나 열등감이 먼저 마음을 덮어버리고는 했다.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는 강박과 부담감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고.


어쩌면 서로 주는 것보다 더 큰 것을 받기를 원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았나 싶다.

다만 그것을 각자가 인지하지 못 했을 뿐.

나 또한 줄 때도, 받을 때도 마음은 쿨하지 못 한데 굉장히 쿨한 척하곤 했으니까.


그런데 사실 주고받는 건 이렇게나 쿨하고 즐거운 일이었다니! 상대에게 단지 온전한 고마움과 즐거움만을 느낄 수도 있는 거였다니!


왜 이 행복을 오래도록 잊고 살았지?

내 삶에 다시금 이 부분을 조금씩 늘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스테야 7.5km

지금 시간은 11시.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걸까?저 멀리 마을이 보이기는 하는데, 저기서 쉴 수 있으려나? 슬슬 템포도 갈아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걷다 보니, 왼쪽에 농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작업 중이었다.


문득 이런 곳에서 평생 농부로 산다는 건 어떤 삶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그렇게 살 자신이 없기도 하고 그런 삶을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게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러니 하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1~2시간째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걸었고, 슬슬 지겨워질 때쯤 마을이 나왔다.

엄청 조용했지만, 집들이 예쁜 마을이었다.

외국 여행을 하다 보면, 이렇게 집 마당을 취향대로 꾸며놓은 걸 보게 된다.

나무 아래에 쉬고 있는 토끼랑 거북이랑 달팽이라니. 위에는 램프도 달려있다.


나도 꼭 나중에 내 취향대로 마당을 꾸며놓고 살아야지. 어떻게 꾸며볼까- 상상하다 보니 어느새 지루함은 사라지고 즐거움이 찾아온다.


12시가 되었고, 걸은 지 5시간쯤 되었을 때 찾은 오늘의 첫 바르(bar)! 공립 스포츠센터 산 히네스(Municipial Sports Centre "San Ginés") 건물 1층에 있는 카페테리아였다.


네스티랑 빵을 주문했다.


그리고 한국인과 일본인 순례자를 만나 같이 합석하게 되었다.

한국 분은 나와 같은 채식주의자라고 해서 신기했다. 채식하는 한국인을 만나게 될 줄이야!

오른쪽 쎄요

잊지 않고 쎄요도 받았다.

생각보다 안 예뻐서 괜히 찍었다 싶었지만ㅋㅋㅋ


같은 채식주의자를 만난 게 신기하기도 하고 반가워서 그녀와 30분을 수다 떨다가 먼저 일어서게 되었다.



소소한 즐거움이 가득한 길



에스테야 3.2km

목적지까지 3~4km가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왼쪽으로는 꽤 큰 성당이 있었는데, 순례자들이 들어갔다 나오기도 하고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종교가 없어서 사실 대부분의 성당은 들어가 보지 않고 지나치곤 한다.

엄숙한 분위기가 취향이 아니기도 하고, 자기성찰은 이미 길 위에서도 제법 많이 하니까.


그것보다 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 예뻐서 감탄했다.


"와~ 너무 예쁜데?"

이건 또 무엇이냐.

저기로 꺾으면 또 뭐가 나오려나 궁금해하면서 걷기.


드디어 에스테야에 도착했다!

에스테야 공립 알베르게

깨알같이 시립 알베르게 한국어가 적혀 있어서 신기했다. 안으로 들어와 보니 꽤 커다란 알베르게였다.

테라스 바로 앞 1층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테라스 문을 열어 주위를 둘러보니 순례자들이 보였다. 더 걸어갈지 고민하는 듯했는데, 나는 오늘 일정을 마쳤다는 생각에 편안함이 몰려들었다.

알베르게 주방

샤워 후에 내려와서 알베르게를 구경했다.

주방도 되게 넓고 자판기에 음료와 간식거리들도 많고.

주방 왼쪽 문으로 나와보니 온통 주황색으로 물들여져 있는 테라스가 나왔다.

밝은 에너지가 느껴지는 것만 같은걸.

세탁기 2대와 건조기 2대도 있었다.

오늘은 세탁기와 건조기로 빨래를 해야겠다 싶어 자리가 빌 때까지 기다렸다.


인스타에 사진을 올리고 핸드폰으로 찍은 영상을 어플로 중간중간 편집하는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된 듯싶다.

휴식 중

블루투스 키보드를 챙겨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단축에 굉장한 도움을 준다!

그러다가 휴식 중이라며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기도 하면서 놀았다.

어느 정도 할 일을 마치고서 슈퍼를 가려고 길을 나섰다.


씨에스타라 역시나 길에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여기는 대부분 2시부터 5시까지 가게 문을 닫는다.

낮잠 타임이라는데, 처음에는 적응이 안 돼서 엄청 신기했다.

방울토마토랑 복숭아 겟!

오늘 점심은 과일.

그러고 보니 혼자서 참 잘 돌아다닌다는 생각이 들었다.


20km가 넘는 길을 걷고 와서 또 왕복 20분을 걸려서 과일을 사 오고, 마을을 구경하고, 사진과 영상을 찍고.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나서 내가 묵을 마을을 구경하는 게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기에 나에게는 새로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으니까.

더군다나 이렇게나 아름답고.

귀여운 그림이 가득한 문닫힌 카페도 보고.

그리고 과일이 너무 맛있다.

엄청 달다!


오늘 저녁은 돈 좀 쓰기로 했다.

대자연 이틀째에 고생했다는 의미로 나에게 주는 선물 :)


어디에서 왔냐고 물어보길래

"쏘이 꼬리아나." 라고 했더니, 태극기를 병에 꽂아서 주었다.


뭐야, 엄청 귀여워!


베지테리안 코스 메뉴를 시켰고, 가격은 12.5유로.

진동벨이 있었는데, 울린 채로 가져갔더니 직원이 뒤를 보여주었다.

STOP 버튼을 누르면 멈춘다고 알려줌 ㅎㅎㅎ

사과 주스랑 수프

주스랑 수프가 되게 맛있어서 기대감이 확 상승했다. 메인 메뉴가 빨리 먹고 싶었다.


그리고 이 맛있는 것을 혼자 먹으려니 아쉬웠다.

하지만 메인 요리는 별로였다.

밥 없이 카레소스를 먹는 기분이었다.

역시 한국인은 밥인가요.


디저트는 시나몬 가루에 바나나 요플레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맛있었다. 굿!


피곤했지만 소소한 즐거움이 많았던 하루가 또 지나갔다.


무엇보다 대자연 이틀째에 22km를 걷고서도 말짱했다! 이 길을 걷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지만, 할 만 한데!?


역시나 사람은 막상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다.

하기 전까지의 두려움을 잘 흘려보내기만 한다면 말이지.



2019.10.07.


푸엔테 라 레이나 → 에스테야

총 22km


트래블희 ᵀᴿᴬⱽᴱᴸᴴᴱᴱ


매거진의 이전글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 day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