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우면 뜨겁다고 말할 줄 아는 어른이 되려고 해.
산티아고 순례길 Day8
나는 오늘도 이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구나.
새벽 6시 반에 길을 나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자거나 짐을 싸거나 아침을 먹거나 하는 이른 시간이다.
확실히 나는 이른 시간에 출발하는 게 좋다. 아직 동이 트기 전에 내가 이 여정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들뜨게 만들고 새벽만의 차가운 공기가, 새벽하늘의 별들을 가만히 올려다보는 시간이,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하게 해 준다.
가만히 볼수록 보여지는 별들 하늘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점점 더 많은 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라는 존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나만의 빛나는 별들을 찾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1시간쯤 걷다가 힘이 부치기 시작하면 뒤를 돌아본다. 그 쯤되면 뒤에서 해가 뜨고 있다.
아직 앞은 어두운데 뒤에서는 이렇게 예쁘게 날이 밝고 있었다니-하는 생각과 함께 힘이 났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막막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여기겠지만, 나도 모르는 새에 이렇게 내 뒤는 밝은 에너지로 차오르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구나.'
드디어 오늘의 첫 번째 마을에 도착했다.
꽤 언덕길이었지만, 마을이란 생각에 괜히 반갑다. 이제는 벌써 일주일째 걷고 있기에 비슷비슷한 마을 이건만 그래도 반갑다. 첫인상은 비슷할지 몰라도 보다 보면 분명 다르다. 같은 꽃이더라도 생김새가 다 다르듯이.
그러나 이런 마을들은 며칠 후면 기억에서 남지는 않겠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잊히지 않을 만한 자신만의 무언가를 지닌다는 것은 굉장한 무기가 되겠구나 싶다. 퍼스널 브랜딩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
오전 8시 40분, 출발한 지 2시간 정도가 되었다. 배도 고팠지만 무엇보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 져서 평소와 다르게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사 먹게 되었다.
네스티에 크루아상 3.3유로.
아직 유로에 대한 감이 안 오지만, 1유로에 1,300원 정도라 치면 꽤 비싸다. 앞의 마운틴 뷰가 예뻐서 순례길 아침의 낭만 값을 지불한 셈 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아침 9시에 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서 2시간을 걸어와 마운틴 뷰를 감상하며 크루아상에 네스티를 먹을 줄 누가 알았겠어. 내가 알았겠어? 어제만 해도 몰랐는걸.
이런, 너무 맛있다.
뜨거우면 뜨겁다고 정중히 말할 줄 아는 어른이 되려고 해.
오늘은 계속해서 이런 풍경길을 걸었다.
몇 시간째 같은 배경의 길을 걸으니 점점 더 시간 개념도, 거리 개념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얼마나 지났는지. 그저 걷고 또 걷는다.
해가 너무 뜨겁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 첫날 비바람 속을 걸을 때는 몇 초간의 햇살도 너무나 따뜻하고 소중하게 여겨졌었는데, 오늘의 너는 너무 뜨겁다.
문득 '적당함'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함.
언제나 인간관계에서, 특히 연애에서 그 적당함이 어렵다고 생각했었다. 멀면 멀다고, 가까우면 가깝다고 문제가 되곤 했으니까.
수많은 실수들을 서로가 서로에게 저질렀다. 그런데 수많은 실수들을 해 보았기에 적당함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저마다 적당함의 기준도 다를 것이다.
정답은 없다.
각자가 자신만의 기준을 정해갈 뿐이다.
20대의 나는 그런 나만의 기준이 굉장히 모호했다. 선을 넘어와도 참았고, 그저 참는 것이 배려이자 일종의 '선'한 행동인 줄 알았다. 그리 배워왔으니까. 휘둘리면서도 휘둘리는지 몰랐고, 나의 중심을 내어주면서도 인지하지 조차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뜨거우면 뜨겁다고 정중히 말할 줄 아는 어른이 되어가려고 한다.
마을 성당 두 번째로 만나는 마을이다.
오늘 루트 중에 무료로 와인을 나눠주는 곳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난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다.
역시 준비한 만큼, 아는 게 많아지는 만큼 똑같은 루트의 여행이더라도 더 잘 즐길 수가 있는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준비를 해야 하고, 같은 곳을 들리고, 같은 경험을 하며 알아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는 와인에 관심이 1도 없는걸.
나는 순례길의 역사에 대해 1도 궁금하지 않는걸.
종교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고 싶은 마음이 없는걸.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큰 의미가 있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20대를 돌아보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왔고 그저 걸으면서 나의 생각을 따라간다. 그렇게 또 나를 알아가고 있다. 내 순례길 여정의 목적은 그것이었으니 충분하다.
그렇게 두 번째 마을도 지나쳤다.
나무에 붙여져 있던 귀여운 표지판 마을을 지나칠 때마다 다음 마을은 얼마나 더 가야 나올까 궁금해진다. 최종 목적지보다 다음 마을에 대한 궁금증이 더 먼저 든다.
왜 그럴까?
최종 목적지는 이미 어딘지 알기도 하고 이 길의 결과 지점이겠지만, 그 목적지를 가는 과정 중에 만나는 마을들은 일종의 이벤트인 기분이 든다. 어떤 마을 일지 알 수 없으니, 더 궁금해진다.
그나저나 오늘은 계속해서 평지였고 길이 끝도 없이 이어져있다.
'하아. 언제 저기까지 걸어가지...' 하는 마음이 저절로 올라온다. 그럴 땐 앞이 아닌 내 발을 보며 걷는다. 그냥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는 내 발과 땅바닥.
'그래. 이렇게 나는 걸어가고 있지.'
옆에 길게 드리워져 있는 내 그림자도 쳐다본다. 힘들지만 몇 시간째 그저 내딛으며 가는 그림자가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그래. 너 힘내고 있구나.'
그렇게 앞을 쳐다보면, 어느새 다 와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여전히 가야 할 길은 멀게 느껴지고 제자리걸음 중인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럼 또다시 반복.
발을 쳐다보며 저 멀리 있는 어딘가가 아닌 코앞의 땅만 보고 걷는다. 그리고선 최대한 깨어있는 의식으로 나만의 생각 어딘가로 빠져 통찰해보려고 노력한다
많이 살아봤다고 해서 삶이 쉬워지는 건 아니야.
Los Arcos 로스 아르꼬스 9km 와, 표지판이다.
또 어느새 이만큼이나 왔다.
오늘 총 22km를 걷는 여정 중에 이제 9km만이 남았다는 생각 반, 여전히 9km나 가야 한다는 생각 반으로 기쁨과 절망을 동시에 느낀다.
일주일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하루하루가 힘들다. 몸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는 하나, 익숙해졌을 뿐 안 힘들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부엔 까미노 (좋은 길, 좋은 여행) 인생도 그렇지 않나.
나이를 먹어간다고 해서, 경험을 많이 해봤다고 해서, 많이 살아봤다고 해서 삶이 쉬워지는 건 아니니까.
모두가 자신만의 삶을 하루하루 책임지며 살아가고 있다. 모든 인간들이, 영혼들이 문득 기특하고도 대단하게 느껴진다. 나도 그렇고.
습관적으로 걷는 와중에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저곳을 걸어올 때는 전혀 몰랐던 풍경을 지나쳐와서야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예쁘다.
힘들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뒤돌아보니 참 예쁘네.
나의 모든 순간의 과거들도 어쩌면 있는 그대로 참 어여뻤지 않았을까. 그 당시에는 너무 힘들고 아파서 알지 못했을 뿐, 그때의 나는 그래도 반짝반짝 빛났고 예뻤다고. 그리고 지금의 나도
사진으로는 너무 예쁜 길이지만, 어마어마한 떵냄새에 질색팔색 하며 걸었다. 지독한 냄새에 뛰어가고 싶었으나 엉긍엉금 기어가야만 했다.
'역시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예쁘고 멋있어 보인다고 전부가 아니지.
어떤 향기를 내뿜고 있는지, 어떤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가 정말 중요해.'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똥냄새 때문에 1초도 있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향기를 가지고 있을까.'
아니지
'나는 어떤 향기를 풍기고 싶은가?'
그래도 예쁘긴 예쁘니 계속해서 폰을 들어 사진을 찍게 된다. 이 풍경은 지금의 나만 담을 수 있는 거니까.
순례길 여정 중에 나보다 더 예쁘고 멋진 광경을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더 깊은 깨달음을 얻는 사람도 분명 많을 것이고, 맛있는 맛집을 많이 알게 된 사람, 좋은 알베르게를 많이 알게 된 사람 등등 굉장히 많겠지.
하지만 그들이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 순간 혼자 즐기고 말았다면, 좋은 정보의 가치들은 공유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장 어제의 일도 기억이 안 나는걸. 내가 어제 걸으면서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졌는지, 그 안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었는지 가물가물한걸.
그래서 하루하루 힘들더라도 기록하며 남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이게 꽤 재밌고 즐거운 일이니까.
어제도 걸었고, 오늘도 걸었고, 내일도 걸을 거니까.
저 멀리 드디어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벌써 걸은 지 5시간쯤 된 것 같고,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그만 걷고 싶던 참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보이는 것 같아도 마을까지 도착하려면 꽤 걸어가야 한다. 하루 중 가장 마지막 고비다. 눈 앞에 보이는데 당장 쉴 수 없을 때.
와, 목적지다
오늘도 22km를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엄청 기쁠 것 같겠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하루하루 목적을 달성하는 것도 익숙해졌나?
뭐 그것도 있지만, 하루하루의 목적에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게 되었다.
오늘 이만큼 해낸 내가 대견하고 뿌듯하지만
어제도 나는 걸었고,
오늘의 나도 걸었고,
내일의 나도 걸을 것이다.
이 순례길의 여정이 끝나고 나면 나는 또 다른 여정의 길을 걸어가겠지. 그렇게 언제든 나아가고 있겠지.
오늘의 알베르게
_ Isaac Santiago 알베르게 (6유로)
역시 일찍 도착해서 아무도 없을 때 샤워를 하고,
손빨래해서 걸어놓고서 이렇게 햇빛 쬐며
여유롭게 하루를 뒤돌아보는 이 시간은
나에게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다.
이 순간들을 더 많이 누리고 즐겨야겠다.
지나고 나서 '그때가 참 좋았는데, 그땐 왜 몰랐을까.'라고 후회하지 않도록.
그럼 오늘도 부엔 까미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