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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게 물든 시간을 걷다: 나주가 건네는 위로

전라도의 이름이 시작된 곳, 천년 목사고을 나주의 가을을 브랜딩 하다

By. 수남(로컬기획자 / 여행작가)


가을은 가슴 시릴 만큼 짧다. 찰나의 화려함을 뽐내고 사라지는 계절의 뒷모습을 보며, 여행자들은 언제나 조급해진다. 하지만 로컬에 자리를 잡고 산지 12년, 로컬 기획자로 살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진정한 가을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화려한 단풍의 채도가 아니라 잎이 모두 떨어지고 난 뒤 드러나는 나무의 골격처럼, 시간의 무게를 견뎌낸 도시가 보여주는 '깊이'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IMG_1202.JPG 나주향교 동재

올해 나의 가을은 전라남도 나주로 향했다. 많은 이들이 무심코 지나치지만, 나주는 호남이라는 거대한 땅의 이름, '전라도(全羅道)'의 절반을 지탱하고 있는 도시다.

전주(全州)와 나주(羅州). 두 도시의 첫 글자가 합쳐서 만들어진 그 이름의 무게만큼, 나주는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왔다.


화려한 관광지가 아닌, 오래된 시간의 결을 따라 걷고 싶었다. 나주 향교의 늙은 은행나무와 나라를 잃은 자들의 상처 무너진 읍성의 다시 세워진 성곽길과 대문, 그리고 폐가가 다시 태어난 공간까지. 나주의 가을을 걷는 일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잊고 지냈던 삶의 가치들을 다시 마중 나가는 인문학적 여정이었다.


1. 나주 향교 : 600년을 버텨온 '일관성'의 미학


나주의 구도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빼앗는 것은 낮은 기와지붕 위로 솟아오른 거대한 노란색 구름, 나주 향교의 은행나무다.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이 나무는 어림잡아 600년의 세월을 살았다.

IMG_1207.JPG 임진왜란에도 살아남은 대성전
?fname=http%3A%2F%2Ft1.daum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1PUc%2Fimage%2FHl8LAlCd15tXn1YY_EocMFGiFg8.JPG 이성계가 심었다는 은행나무


향교의 대성전 앞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압도적인 생명력에 숨이 탁 막힌다. 가을의 절정에 다다른 은행나무는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지워버릴 듯 온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은행잎 비(雨). 바닥에 소복이 쌓인 노란 잎들을 밟을 때마다 '사각사각' 가을의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것은 단순한 낙엽 밟는 소리가 아니라, 수백 년 전 이곳을 거닐며 학문을 논하던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이자 역사의 낮은 속삭임처럼 들렸다.


IMG_1208.JPG 유생들의 기숙사, 동재의 툇마루에 앉아 은행나무를 바라본다

퍼스널 브랜딩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에게, 이 늙은 은행나무는 <일관성(Consistency)>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트렌드는 매일같이 요동친다. 하지만 이 나무는 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묵묵히 제 자리에서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다. 그리고 매년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자신의 가장 찬란한 색을 세상에 드러낸다.


우리는 너무 자주 흔들린다. 남들의 속도에 맞추느라, 유행을 좇느라 정작 나만의 색을 잃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나주 향교의 은행나무는 말없이 가르쳐준다. 가장 강력한 브랜딩은 화려한 포장이 아니라, 비바람을 견디며 한 자리를 지켜낸 '시간의 축적'에서 온다는 것을. 그 웅장한 노란색 그늘 아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의 브랜드는 어떤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2. 나주 읍성 : 무너진 돌을 쌓은 25년의 회복


향교의 은행나무가 주는 감동을 뒤로하고 돌담길을 걷다 보면, 나주목의 객사였던 '금성관'과 마주 하게 된다. 웅장한 건축미와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곳이지만 이곳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건물 자체가 아닌 그 너머의 이야기였다. 바로 <나주읍성의 복원사(復元史)>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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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문과 성곽. 성곽길을 걷다보면 향교도 만나고 금성관도 만날 수 있다.

나주읍성은 고려시대부터 나주를 지켜온 든든한 울타리였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였던 1910년대, 일제는 도시계획과 도로 확장이라는 명분 아래 읍성의 4대 문과 성벽을 처참하게 허물어버렸다. 천 년을 지켜온 성벽의 돌들은 뿔뿔이 흩어져 영산강 제방을 쌓거나 등대를 만드는 재료로 팔려나가는 수모를 겪었다.


도시의 자존심이 무너졌다. 하지만 나주는 그 상처를 그대로 덮어주지 않았다. 1993년 남고문(남문) 복원을 시작으로 2006년 동점문, 2011년 영금문, 그리고 2018년 북망문에 이르기까지. 무려 2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잃어버린 4대 문을 모두 다시 세웠다.


지방의 소도시에서 4대 문을 완벽하게 복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복원이 진행 중인 금성관 마루에 걸터앉아 떨어지는 은행잎을 바라본다.

향교와 마찬가지로 600년의 긴 세월을 버텨낸 은행나무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나주의 흥망성쇠, 이름 없는 이들의 희로애락을 묵묵히 지켜보며 지나가는 바람에 무심히 노란 잎을 떨어뜨리며 서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일상의 작은 부딪침을 잠재워 준다.


"괜찮아! 괜찮아! 바람이 지나가듯 다 지나갈 거야"


IMG_1175.JPG 금성관 뒷마당 은행나무, 나주의 흥망성쇠와 이름없는 이들의 희로애락을 지켜보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나무


상처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 중요한 것은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상처를 어떻게 회복하느냐다. 나주가 보여준 25년의 집념은 우리에게 말한다. 무너져도 괜찮다고. 돌 하나한 다시 주워와 쌓아 올리면 예전보다 더 단단한 성벽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나주의 가을바람이 유독 깊고 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 땅 아래 흐르는 뜨거운 <회복(Discovery)>의 서사 때문일 것이다.


3. 3917 마중 : 낡은 것에서 발견한 '재생'의 미래.


역사의 무게와 회복의 감동을 안고, 발걸음은 나주가 보여주는 현재와 미래로 향한다. 향교 근처, 골목길 안쪽에 비밀의 정원처럼 숨어있는 복합문화공간 <3917 마중>이다.


IMG_1227.JPG 정원에 금목서가 많아 목서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안채


이곳의 이름은 숫자로 된 암호 같다. '3917'. 이것은 1939년에 지어진 나주의 근대 가옥을, 2017년에 복원하여 다시 세상의 마중물로 삼았다는 뜻을 품고 있다, 구한말 의병장의 후손이 살았던 이 고택은 한옥과 일본식, 서양식 건축 양식이 기묘하게 섞인 독특한 매력을 지녔지만, 오랜 세월 방치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가던 폐가였다.


잡풀이 무성하고 쓰러져가던 공간을 발견한 것은 한 기획자의 안목이었다. 그는 낡음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그 속에 담긴 시간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4,000평에 달하는 정원을 정비하고, 무너진 기와를 손보았다. 그리고 그 공간에 나주의 특산물인 '배'를 활용한 콘텐츠를 채워 넣었다.


IMG_1219.JPG 배로 만든 빵


지금 이곳은 나주 배로 만든 양갱과 음료를 즐기려는 젊은이들로 북적인다. 1939년의 적산가옥 마루에 2025년의 여행자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풍경. 이것은 단순한 카페가 아니라 <재생(Regeneration)>의 현장이다.


3917 마중은 로컬 여행의 미래를 보여준다. 새로운 것을 짓는 것만이 발전은 아니다.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낡고 오래되어 쓸모없다고 여겨졌던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닦아내는 과정. 그 속에서 발견한 고유함이야말로 가장 세련된 콘텐츠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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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나주 다시 나를 브랜딩 하는 시간


나주의 가을 해가 금성산 너머로 뉘엿뉘엿 저물어간다. 붉은 노을이 향교의 노란 은행나무와 금성관의 기와지붕, 그리고 3917 마중의 낡은 담장 위로 공평하게 내려앉는다.


오늘 하루, 나는 나주라는 도시를 여행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인생의 교과서를 한 권 읽은 기분이다. 600년 은행나무가 보여준 '일관성', 25년간 무서진 성벽을 다시 쌓은 '회복', 그리고 버려진 폐가를 보물로 바꿀 줄 아는 '재생'의 지혜까지.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브랜드를 꿈꾼다. 하지만 브랜딩은 거창한 슬로건이나 화려한 로고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진 뿌리가 무엇이지 알고(일관성),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서며(회복), 나의 낡은 모습조차 새로운 가치로 재해석(재생)할 줄 아는 태도에서 완성된다.


가을의 끝자락, 마음이 소란스럽거나 길을 잃은 기분이 든다면 나주로 떠나보길 권한다. 그곳에는 천 년의 시간이 묵묵히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단단한 위로가 필요한 당신에게, 나주는 가장 완벽한 가을을 내어줄 것이다.


전라도라는 이름의 시작, 나주에서 나는 나를 마중 나간다.


Writer. 수남

귀촌 12년 차, 로컬 기획자이자 여행작가. 화려한 관광지보다는 로컬의 깊은 이야기에 마음을 뺏깁니다. 12년 전 짐을 싸서 지리산으로 내려온 후, 지역의 오래된 가치를 발굴하고 사람과 공간을 잇는 기획자로 살고 있습니다. 여행자의 설렘과 생활자의 깊이를 담아 로컬의 오늘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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