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레이 Jan 09. 2019

[주간에세이] 나는 어쩌다 쓰는가

주간BD,1월 2주

무언갈 쓴다는 건 그 자체로 숙제 같은 부담이었다. 그건 아마도 언제부터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어렸을 적부터 썼던 일기 숙제 때문이지 싶다. 어떻게든 하얀 노트를 채우기 위해, 밥 먹는 일도 '참 재미있었'고 엄마에게 혼난 하루조차도 '참 재미있었'던, 그야말로 그저 모든게 '참 재미있었던' 그 시절 일기를 쓰던 나는 참 더럽게도 재미 없었다. 어리디 어린 초딩 저학년임에도 칸을 채우기 위해, '그러나'와 '그리고'의 역접과 순접의 접속사를 남발하고, 최대 폰트 크기로 늘려 쓰는 꼼수를 썼던 걸 보면 잔머리 학습에 일기는 최적의 교육 콘텐츠인 것 같기도 하다.

중고등학교 시절 썼던 독후감과 독서감상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책을 읽고 쓰는 것이 독후감이요 감상이 들어간 것은 독서감상문이나 사실은 책의 제목과 서문, 에필로그의 짬뽕이 독후감이요, 거기에 주인공에 감정이입한척하며 내 감성을 짜내는 것이 독서감상문이었다.

일기 쓰기는 정말 노잼이었다

어느 누구도 글쓰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친절히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독학으로 습득한 '글쓰기는 노잼. 부담스러운 것'이라는 진리는 백지에 무언갈 쓸 때마다 두려움이 되었고, 글쓰기 자체에 대한 거부감으로 자랐다.

하라고 하면 하기 싫고,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청개구리 증후군(같은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이 발동하던 오춘기의 스무 살 즈음 되었을 때, 비로소 자발적 글쓰기를 시작했다.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글쓰기가 좋아졌다기 보다, 싸이월드의 다이어리와 게시판 기능 때문이었다. 빈 골대가 있으면 공을 차고 싶고 입을 벌리고 있으면 손가락을 넣고 싶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갖는 본능의 충동처럼, 미니홈피라는 사이버 공간의 백지에 나만의 무언갈 채워 넣고 싶다는 N세대, 밀레니얼세대 다운 충동이 들었다. 처음은 그저 투데이 수와 일촌평을 늘리기 위한 1인 미디어 크리에이터의 마케팅 수단이었다.

스무 살 내 미니홈피 첫 작품은 초딩 때 썼던 그림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식이를 만나 삼겹살을 먹었다. 참 맛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십여 년 일기를 쓰며 배운 게 있기는 있었는지 조금씩 나아졌다.'민식이를 만나 삼겹살을 먹었는데, 마치 저팔계가 내 입에서 트위스트를 치며 제 몸을 스르르 녹이는 느낌의 천상의 맛이었다.'

글이 하나둘씩 늘어갈수록 늘어난 건 게시판 글의 조회 수와 일촌평만은 아니었다. 스무 살이 넘어서야 비로소 내 느낌과 생각을 표현을 하게 되었고, 감성과 표현과는 거리가 먼 삼형제의 무뚝뚝함도 게시판에 글을 남길 때는 교회 오빠의 따스함과 오글거리는 감성충만으로 바뀌었다.


머릿속에 어렴풋하게 존재하고 가슴속에 뿌옇게 남아 있던 내 생각과 무형의 감정을, 글자라는 붓으로 테두리를 그리고 문장이라는 물감으로 색 칠하는 글쓰기의 과정을 통해 나는 나를 알아가고 정의했다. 그것은 내가 느낀 글쓰기의 첫 재미이자 기쁨이었다. 나는 무엇을 느끼고, 느끼지 못했는지. 그것을 왜 그렇게 느끼고, 느끼지 못했지. 그것을 그렇게 느끼고, 느꼈던 나에게 남은 것은 결국 무엇인지. 대단할 것도 없는 글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생경한 나를 발견하고, 그렇게 나의 개성과 특성이 하나씩 쌓여져갔다. 생각이 쌓여 글이 나온다기 보다 글을 쓰며 부유하던 내 생각이 가라앉고 쌓여 정리되는 느낌.

조지오웰은 왜 쓰는지에 대해 간지나게 썼지만 나는 왜 쓰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존재하기만 하던 나'를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식하며 존재하는 내'가 된 것이 글쓰기가 준 첫 선물이었다면 두 번째 선물은 자아의 확장으로 인한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다. 아무리 슬픈 책과 영화와 드라마를 봐도 전혀 슬프지 않고, 슬퍼하는 이들의 모습이 오히려 어색해 쓴웃음 짓고 오그라드는 냉혈인이었던 나는 글쓰기를 통해 내 안의 슬픔과 우울을 알았다. 침잠해 있는 절망과 슬픔은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이 분명한 모양이었고, 분명했기에 다른 이들 안의 슬픔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기계적이고, 기술적인 공감이 아닌 너의 슬픔과 통증이 그대로 느껴지는 공감각적 이해. 상대를 생각하며 글을 쓸 때 비로소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밥벌이를 하면서부터 밥벌이를 위한 글쓰기 시간은 늘었으나 나를 위한 글쓰기는 줄었다. 짬을 내어 꾸준히 글을 쓰는 게 중요하다는데 짧을 글이라도 행복한 글쓰기는 고통을 수반하기에 그 고통을 감수할 만큼의 인내가 진이 빠진 퇴근러에게는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행복해지기 위해 꾸준한 글쓰기를 하기 위해 매주 에세이 한 편씩 쓰겠다 작년 말에 선포하기도 했다. 선포한 이후 한 편 쓰고 다시 시작도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새해가 되었으니 다시 선포한다. 1일 2커피! 1주 1에세이! 어쩌다 시작한 글쓰기, 어떻게든 다시 써볼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간에세이] 하마터면 잘 못 놀 뻔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