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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 Aug 09. 2020

상자 속의 나

손편지에 담긴 내 모습

작년 동생이 결혼으로 집을 나간 후 동생이 쓰던 곳으로 방을 옮겼다. 내 방은 습기가 많아 곰팡이가 생기다 보니 더 쾌적한 동생 방이 더 나을 거 같았다. 남자 방에 침대 책상 의자 옷장 외에 딱히 필요한 게 없으니 가구는 그대로 두고 내용물만 옮겼다. 앞으로 쓰지 않을 것은 빼고 진짜 중요한 것만. 오랜만에 책상 밑에 들어가 뭣이 중한지도 모른 채 중요한 것들을 추리기 시작했다. 수년간 거들떠보지 않은 책과 서류는 쓰레기통에 담고, 책장 깊숙이 습기 베인 작은 종이 상자를 손에 집었다. 편지 상자였다. 학창 시절부터 받은 손편지는 쓴이의 성의를 봐서 내용이 성의 없거나 길이가 짧더라도 상자에 담아왔다. 지금은 기억도 안나는 친구가 준 생일 축하 카드부터 오랜 시간 추억을 나눈 여자 친구의 편지까지. 10대, 20대 그리고 지금까지의 기억이 담긴 상자였다.


당장 쓸데는 없지만 청춘과 추억이 담긴 상자라는 생각에 일단 방으로 옮겨 꺼내 읽었다. 당시 가까운 동생의 장난스런 편지, 갑작스런 헤어짐에 아쉬워하는 교회 동생의 빼곡한 글, 얼마나 많은 감정을 눌러 담아 썼을지 모를 만큼 눈물 자욱이 번진 이별한 친구의 편지, 의미 없는 내용으로 가득 찬 롤링페이퍼...


편지를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편지 속 그때로 시간 여행이 시작되었다. 추억들이 떠올라 잠시나마 입 꼬리가 올라가기도 하고, 지금은 연락할 수 없는 이들과 돌아갈 수 없는 그때 생각에 씁쓸하기도 했다. 얼마나 읽었을까. 뒤죽박죽 쌓인 편지를 시간의 순서와 관계없이 읽으며 남은 것은 결국 쓴이가 바라본 내 모습이었다. 언제였을지 모를 그때, 그 사람의 눈에 비친 내 모습. 언젠가 누군가가 낡은 편지지에 써 내려간 나. 낭만과 환상, 때론 피상일지라도 그것 역시 나였다.      


손 편지는 왠지 그냥 버리기 좀 거시기하다


내가 본 너는 어른스럽고, 듬직한 사람이야
형은 제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어요. 형과 함께한 시간들 행복했어요
너가 얄미울 때도 있어서 보기 싫기도 했어. 미안해
오빠의 개그가 그리울 것 같아요. 겉으론 참았었는데 사실 속으론 많이 웃었어요



편지 속 나는 사랑했던 친구를 힘들게 하기도 했고, 동생들에게 힘을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진지함에 고리타분하면서도 개그 욕심 많은 유머러스한 형, 오빠이기도 했다. 그 시절 누군가에게는 절절하게 사랑받는 사람이었고, 꼭 그만큼 사랑 주는 사람이었다. 어떤 이에게는 의미 없을 어딘가 있을 무언갈 위해 청춘의 시간을 바치기도 하고, 장대 같은 비가 내리는 장마철 사랑하는 사람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순정이 있던 사람이었다.


편지 속 나는 오늘의 나와 조금 달랐다. 닭장 같은 사무실, 피상성으로 칠해진 관계와, 삶의 의미는 진작 의미 없어진 쳇바퀴 같은 일상 속 요즘의 나는 편지 속 그가 아니었다. 순간의 처세와 문제 해결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 지금의 현실의 나는, 어째 쭈글 한 편지지 속 제3자에 의해 MSG 듬뿍 뿌려진 내 모습보다 더 나 답지 않았다.


만약 집에 불이 나면 편지 상자를 본능적으로 챙겨갈 것만 같다


현실은 밥벌이의 지겨움을 이겨내고 지옥철 출근길을 나서는 일개 직장인이지만 그게 진짜 내 모습은 아니다. 오늘도 직장 상사의 시답잖은 개그에 진작부터 물개 박수를 준비하는 때로 비굴한 사회인이지만 그 순간이 나를 모두 설명해 주진 않는다. 월급날 통장을 스쳐가는 카드값, 대출이자에 쓴웃음 짓는 평범한 30대 남성이지만 그 웃음이 나라는 사람의 진의(義)는 아니다.


그 날 이후  날 전기구이 통닭을 사 오셨던 아버지처럼 짜증 나는 일이 많았던 날 퇴근 후 책상 밑 편지 상자를 열어보곤 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을 말이 되게 만들라는 상사의 지시를 받은 날. 말이 되는 일을 말 같지도 않은 방식으로 처리해야 했던 날. 30여 년 동안 쌓은 나라는 사람의 과거와 가치관은 1도 고려되지 않는 대우를 받은 하루. 그런 날 나는 진짜 나를 찾기 위해 상자를 열어 편지를 읽어 내려간다.


상자 속의 진짜 나를 찾는 의식 같은 몸부림인지 모른다. 조금은 슬프지만 어쩌면 진짜 나 다운 내 모습은 낡은 편지지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라본 나라는 사람의 진짜 모습. 그것이 담백하게 쓰여진 낡은 편지지. 그 속에 담긴 나다운 나. 오늘도 진짜 나를 꺼내기 위해 편지 상자를 연다. 아이러니하지만 박제돼있는 편지 속 내 모습에 내일을 나 답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왼쪽 노란색 냅킨에 적은 편지는 매우 성의 없어 보이지만 꼭 그만큼의 다급함과 절실함이 느껴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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