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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EAMER Jun 13. 2017

당위명제와 사실명제의 진릿값 규명 딜레마에 관하여

(가)<정책명제는 정합적으로 연역될 수 없다. 그것은 사실적 차원의 명제가 아니라 당위적 차원의 명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책명제는 공리화(Axiomatize)된 가치명제이며, 때문에 명제의 내용적 사실들이 내포하는 특정한 가치체계로의 부합을 요구하는 독특한 종류의 상대적인 공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과거 아포리즘 (가)에서 잘못된 주장을 했다. 정책명제는 정합적으로 연역될 수 있다. <정합적 연역>은 명제와 명제 사이의 논리적 관계에 관한 표현일 뿐 명제의 진리치에 관한 표현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정책명제는 정합적으로 연역될 수 없다>는 주장은 내가 처음 의도한 바에 따라 <정책명제는 정합적으로 연역 가능하지만 원리적으로 어떠한 진릿값도 가질 수 없다>는 주장으로 교정되어야 옳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주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정책명제는 정합적으로 연역 가능하지만 원리적으로 어떠한 진릿값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사실적 차원의 명제가 아니라 당위적 차원의 명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책명제는 공리화(Axiomatize) 된 가치명제이며, 때문에 명제의 내용적 사실들이 내포하는 특정한 가치체계로의 부합을 요구하는 독특한 종류의 상대적인 공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책명제는 정말 원리적으로 어떠한 진릿값도 가질 수 없는 것인가? 우리는 핵심적인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당위 명제적 언명의 진리치에 대한 딜레마를 우선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나)에서 정책명제는 공리화 된 가치명제라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ㅡ명제의 공리화에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문제와 마찬가지의ㅡ문제가 생긴다. 서로 충돌되는 가치명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 두 개 이상의 정책명제가 제시될 때가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과거 <공리의 딜레마와 공리화 된 언명의 역추적 가능성>에서 지적했던 공리화 된 언명의 충돌과 정책명제 사이에서 나타나는 딜레마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공리화 된 일반적인 명제는 단순진술인 반면 정책명제는 당위성을 가진다는 점이고, 때문에 특정한 종류의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다는 점일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명제를 생각해보자.

(K1)인간의 존엄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K2)인간의 존엄성은 존중되지 않아야 한다.

명제 (K1)은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과, 인간에게 존엄성이 있다는 것과, 그 존엄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세 개의 사실을 선제(Presuppose)하고 있는 언명이다. 반면 (K2)는 인간의 존재와, 인간이 존엄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긍정하지만 존엄성이 존중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선제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명제 (K1)은 다음과 같이 논증될 수 있다.

(K1a)
P1.존엄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P2.인간이라면 존엄성이 있다.
Q1(P1,P2).인간의 존엄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여기서 볼 수 있다시피 대전제 P1과 소전제 P2가 참일 때 결론 Q1 역시 참이므로 당위명제 Q1은 가정적 삼단논법(Hypothetical syllogism)을 통해 정합적으로 연역될 수 있다. 그러나 논증 (K1a)의 논리적 관계는 타당하지만 모든 전제가 참인, 건전한 명제라고 보기엔 힘들다. 위 논증은 어째서 인간이라면 존엄성이 있는지, 그리고 어째서 존엄성이 그것에 대한 존중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명제 P1은 가치명제이므로 인간에게 존엄성이 있다는 진술에 대한 건전성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명제 P2는 존엄성이 있다는 진술과 존중되어야 한다는 진술사이에 존재하는 상관관계에 대한 서술이 배제되어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정책명제와 가치명제를 다룰 때에는 건전성에 대해 논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논증 (K1a)는 연역적으로 타당한, 즉 올바른 논증이기는 하지만 건전한 논증이라거나 건전하지 않은 논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ㅡ매우 흥미롭게도ㅡ당위명제의 강제성이 건전성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을 부각시킨다는 점에 대해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명제 (K1)과 (K2)가 동시에 제시된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존중되면서 존중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에 최소한 한 쪽이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명제 (K2)를 부정한다고 할 때 그것의 근거는 무엇인가? 가령 <인간의 존엄성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정책명제 (K1)이 주체 p에 의해 제시되고 <인간의 존엄성은 존중되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명제 (K2)가 주체 q에 의해 제시된다면 {p→⊢K1, q→⊢K2}가 성립되며, 이는 곧 {p→⊢K1, q→⊢~K1}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모순되는 진술인 (K1)과 (K2)를 둘 다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p의 주장이나 q의 주장을 긍정해야 한다. 문제는, (K1)을 긍정하거나 (K2)를 긍정할 때 우리는 위의 논의에 따라서 정책명제인 (K1)과 (K2) 중 어느 것이 참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결론에 봉착한다는 점이고, 만약 (K1)이 참인 언명이라는 것을 규명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K2)가 거짓인 언명이라는 것 역시 규명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문제의 심각성은 도덕철학적 관점에서 이 사실이 적용될 때 어떻게 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을 듯이 보인다. 다음과 같은 논증을 보자.

(K1b)
P1.만약 ⊢p라면 주체는 명제 p의 진술에 따라 행동한다.
P2.주체는 ⊢K1이다.
Q1(P1,P2).주체는 K1의 진술에 따라 행동한다.

<주체 Q는 명제 p의 진술에 따라 행동한다>는 언명을 <Qp§a>로 표현하고 주체를 S라 표현할 때 우리는 논증 (K1b)를 다음과 같이 기호화 할 수 있다.

(K1c)
P1.⊢p→Sp§a
P2.S→⊢(K1)
Q1(P1,P2).§a

문제는 논증 (K1c)에 명제 (K2)가 함께 고려될 때 나타난다. 다음의 논증을 보자.

(K1d)
P1.⊢p→Sp§a
P2.S→[⊢(K1)∨⊢(K2)]
Q1(P1,P2).S(K1∨K2)§a

만약 논증 (K1d)에서 주체가 명제 (K2)가 참이라고 주장한다면ㅡ즉 ⊢K2ㅡ라면ㅡ주체 S는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지 않아야 한다는 명제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사고실험을 생각해보자.

(사고실험 A)
<J는 유명한 강도 단체의 소속이다. 그는 수장 Z가 아끼는 최고 간부이기 때문에 Z는 J의 말이라면 전부 들을 정도로 J를 신뢰했다. 어느 날 Z는 부하들과 함께 K중학교를 습격해서 일부의 학생들을 납치했다. Z가 원하는 것은 학생들의 몸값이었고 돈을 내지 않는 부모의 아이들은 전부 죽일 예정이었다. 안타깝게도 모든 부모들은 몸값지불을 거절했고 이 때 Z는 J에게 돈을 주지 않는 부모의 아이들을 죽이는 것이 정말 좋을지 아니라면 살려서 보내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물었다. Z는 J의 말이라면 전부 듣기 때문에 J는 이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만약 <사고실험 A>에서 J가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몸값을 주지 않은 부모의 아이들은 무사히 살아 돌아갈 수 있겠지만 그 반대라면ㅡ다른 변수가 작용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ㅡ아이들은 전부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경우는 어떨까?


(사고실험 B)
<J와 D는 유명한 강도 단체의 소속이다. 그들은 수장 Z가 아끼는 최고 간부들이었기에 그들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었다. 어느 날 Z는 부하들과 함께 아이들 다섯 명을 납치했다. Z가 원하는 것은 아이들의 몸값이었지만 아이들의 부모는 아이들의 몸값을 지불하지 않았고 Z는 J와 D에게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이러한 Z의 물음에 대해 J는 아이들을 살려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D는 아이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Z는 자신이 아끼는 두 명의 간부들의 의견이 충돌하는 것을 보고 고뇌에 잠겼다.>

여기서 아이들을 살려서 보내는 것이 곧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이고 아이들을 죽이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만약 그렇다면 J는 (K1)을 주장하는 것이고 D는 (K2)를 주장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1)우리가 Z이고, 2)우리의 선택은 전적으로 J와 D의 의견에 종속돼있다고 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네 개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A=아이들을 살리는 상황
D=아이들을 죽이는 상황

a)J가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D가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A)
b)J가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D가 아이들은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
c)J가 아이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D가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
d)J가 아이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D가 아이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D)

경우의 수 a)에서 우리(Z)는 별다른 문제없이 아이들을 살리면 되고, 마찬가지로 경우의 수 d)에서 우리는 역시 문제없이 아이들의 목숨을 끊으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b)와 c)에 있다. J와 D가 서로 아이들의 존엄성, 좀 더 적확하게는 생명권에 대한 상반되는 당위명제를 주장하고 있는 경우라면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인가? 위 <사고실험 B>의 경우는 경우의 수 b)에 해당하는 상황인데, 혹자는 이에 대해서 두 가지의 비판을 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사고실험 B>에서 Z가 (K1)과 (K2) 양자 모두 선택하지 않는다면(K1∣K2)ㅡ즉 Z가 J와 D의 조언을 모두 거부한다면ㅡ이와 같은 당위명제의 충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며, 두 번째로 굳이 Z가 칸트의 의무론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해도 그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 위 사고실험 B에서 Z는 명제 (K1)을 주장하는 J의 주장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는 지적이 그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지적은 <사고실험 B>에서 볼 수 있다시피 Z에게 선택지는 (K1)과 (K2)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노골적으로 표현해보자면 (K1)과 (K2)의 차이는 <아이를 죽이느냐 마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P]가 모순을 의미할 때 나는 다음과 같은 논증을 통해 (K1)과 (K2)의 동시부정(K1∣K2)이 모순이라는 사실을 연역할 수 있다.

(*K1d)
P1.K1§a∨K2§a
P2.K2§a→~K1§a
Q1(P1,P2).K1§a∨~K1§a

R1.⊢p→Zp§a
R2.Z→[⊢(K1)∨⊢(K2)]
Q2(R1,R2).Z(K1∨K2)§a
R3(Q1,Q2).Z(K1∨~K1)§a

S1.(p∣~p)§a→[~p∙~(~p)]§a
S2.[~p∙~(~p)]§a→(~p∙p)§a
T1.(p∙~p)→[*P]
P3(S1,S2,T1).(~p∙p)§a→[*P]
S3(S1,S2,P3).(p∣~p)§a→[*P]

Q3(S1,S2).(K1§a∣~K1§a)→(~K1§a∙K1§a)
Q4(P3).(~K1§a∙K1§a)→[*P]
R3(Q3,Q4).Z(K1∣~K1)§a→[*P]

내가 논증 (*K1d)를 통해 명증한 것은 간단하다. (i) P1-P2-Q1에서 (K1§a∨K2§a)가 (K1§a∨~K1§a)와 동치라는 것을 가정적 삼단논법(hypothetical syllogism)으로 논증했고, (ii)R1-R2-Q2-R3의 간략화 작업을 통해 주체 Z가 명제 K1이나 K2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고 그 선택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는 사실을 연역했으며, (iii)S1-S2-T1-P3-S3의 복합논리전개를 통해 (p∣~p)§a가 (~p∙p)§a라는 것을 연역하고 명제 (~p∙p)가 제 3차 배척의 원리, 즉 배중률의 법칙에 위배된다는 사실로부터 (~p∙p)§a가 모순 [*P]라는 사실을 연역했으며, (iv) Q3-Q4-R3을 통해 (~K1§a∙K1§a)가 모순이라는 전제로부터 명제 Z(K1∣~K1)§a역시 모순이라는 결론을 최종적으로 도출했다.

이와 같이 배중률의 법칙을 통한 선언적 삼단논법에 의해 제 3의 주체인 Z는 (K1)과 (K2) 중 하나의 결론을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고실험 B에서 Z가 (K1)과 (K2) 양자 모두 선택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당위명제의 충돌을 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비판은 논박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두 번째 비판이 제기된다. 요컨대, Z가 합리적인 사람이고 조금의 양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Z는 아이들을 살려 보내는 선택인 J의 말을 들을 것이므로 문제시 되는 것이 없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두 가지로 귀결된다. 1)명제 (K1)과 (K2) 중 어느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존엄성 존중의 근거가 되는 요소들의 기준(standard)ㅡ즉 우리가 (K1)을 선택한다면 어째서 (K2)를 선택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는 기준ㅡ을 규명해야 하는데 그것이 전적으로 불분명하다는 점과, 2)만약 명제 (K1)과 (K2) 중 하나가 진실이라면 참, 거짓 여부를 밝히지 못하며 그 어떠한 진릿값도 가질 수 없는 기존의 가치 명제적 차원의 언명과는 달리 명제 (K1)과 (K2)가 주체의 수용여부에 따라서 상대적인 진릿값을 가질 수 있다는 매우 흥미로운 결론이 나온다는 점이다.


이 때 1)에 의해 이렇게 제기된 기준불명확성의 문제는 도덕철학적 관점에서 쉽게 논박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기준이 칸트의 의무론이나 모든 인간들은 경험-초월적 존재에게 선험적으로 부여받은 본유적인 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 로크의 도덕적 절대주의일 때 우리는 손쉽게 당위명제 (K2)가 부정될 수 있는 혹은 부정되어야 하는 명분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기준점 자체가 절대적이어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는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가령 <사고실험 B>에서 아이들을 죽일 때 한명 당 1억 원을 얻게 되고, Z는 죽어가는 부하의 치료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상정하고 아이들 열 명을 죽이면 부하 백 명을 살릴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벤담의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Z는 얼마든지 (K2)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이 도덕적 기준점이 상대적인 이상(이것은 곧 칸트의 의무론이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나 몽테뉴의 문화적 상대주의보다 우월하다고 할 만한 객관적인 근거가 없으므로 의무론자가 상대주의자를 비판하는 것은 신념체계를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위 당위명제 (K1)이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부정될 수 있고, (K2)가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긍정될 수 있다는ㅡ문제가 있어 보이는ㅡ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말은, 10억 명의 인간을 죽여도 나머지 60억 명이 결과적으로 더 행복해진다면 그것은 긍정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10억 명에 우리는 물론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면 우리는 이제 (K2)가 부정되어야 하는 이유가 생기게 된다. 요컨대, 당위명제 (K1)과 (K2)가 어느 쪽이던지 긍정되거나 부정될 수 있다는 점은 살인자가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을 죽인다 해도 그것은 원리적으로 윤리적 정당성을 갖는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때문에 우리는 (K1)이 부정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막고 (K2)가 긍정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필요, 다시 말해 둘 중 하나가 참이고 다른 한쪽이 거짓이라는 것을 규명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두 번째 문제인 당위명제의 진릿값에 대한 딜레마가 나오게 된다. 만약 위에서 언급한 <사고실험 B>에서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는 J의 말이 옳다면 그것은 곧 인간의 존엄성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당위명제가 건전성, 그러니까 참, 거짓여부에 대한 진릿값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해 가치명제가 진릿값을 갖는다는 딜레마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고 한다면 (K1)과 (K2)의 도덕적 정당성이 관점에 따라 가변적이라고 할 때 도덕적 기준으로는 당위명제 (K1)과 (K2)의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논증 (*K1d)에서 연역한 것과 마찬가지로 (K1)과 (K2) 중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체의 수용여부에 따라서 특정한 당위명제가 상대적인 진릿값을 가질 수 있다는 괴이한 결론에 봉착하게 된다.

아마 이렇게 나타난 역설에 대해서 나는 세 가지의 비판을 해볼 수 있을 듯이 보인다. (i) 만약 주체의 주관적인 판단척도에 의해 <진릿값을 가질 수 없는 기존의 정책명제 (K1)>에 일시적인 진릿값이 할당될 수 있다면, 우리는 또 다른 주체가 정책명제 (K2)를 참이라고 주장한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 명제 (K2)가 일시적인 진리치를 갖는 경우역시 생각해볼 수 있으므로 실상 (K1)과 (K2)의 참, 거짓 규명 불가능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ii)주체에 의해 어떤 명제가 옳다고 판단될 수 있다는 사실이 특정 명제가 진릿값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판단의 차원>은 <참 거짓 규명의 차원>과 인과적으로 무관(Causally unrelated)하며, 전자는 가치 명제적 차원을 의미하고 후자는 사실 명제적 차원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고실험 B>에서 Z가 당위명제 (K1)을 선택하거나 그것이 옳은 것이라 판단했다고 해서 명제 (K1)이 참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iii)주관적인 판단으로 형성된ㅡ편의상 임의적으로 만든ㅡ상대적, 혹은 일시적인 진릿값이라는 개념은 기실 그것이 상대적이라는 점에서 <진릿값>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것은 논리적 의미에서 참이라기보다는 가치판단적 의미에서 참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국 그 판단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은 하등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보자면 아무리 참, 거짓 규명이 필요할 수 있는 상황이 존재한다 해도 그것은 기실 적확하게 표현해보자면 어느 쪽이 합리적이거나 어떤 선택이 가장 이득이거나 좋은 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한 상황일 뿐 참 거짓 규명이 필요한 상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까지의 논의를 통해 서로 충돌되는 두 개의 당위명제가 제시되어도 그 명제가 어떤 종류의 가치판단을 내포하고 있는 이상 진릿값을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위에서 다룬 두 가지의 정책명제의 진릿값 규명이 불가하다는 사실을 토대로 모든 정책명제의 진릿값 규명에 불가능하다는 귀납을 과연 우리는 믿을 수 있는가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정책명제의 집합> P가 <진릿값을 가질 수 있는 사실명제들의 집합> Q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집합 P와 Q는 우유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아니라면 집합 P와 Q에는 어떤 교집합이 있어서 우리가 위에서 다른 명제 (K1)과 (K2)는 단순히 집합 P의 원소이면서 집합 Q의 여집합에 속하는 명제들일 뿐인 것인가? 정책명제가 원리적으로 어떠한 진리치도 가질 수 없는지의 여부를 알기 위해서는 정책명제가 일차적으로 사실명제에 포함되는지 가치명제의 진부분집합인지에 대해 규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의외로 매우 간단하다. 모든 사실명제가 진리치를 가질 수 있고 모든 가치명제가 진리치를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사실명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정책명제를 찾음으로서ㅡ즉 사실명제를 당위명제로 변형함으로서ㅡ정책명제의 진리치 규명 불가능성의 정당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명제를 보자.

(Y1)프랑스의 수도는 베를린이다.

이 사실명제, 즉 종합적 명제(Synthetic proposition)에 포함되는 명제는 경험적 참(contingent truth), 혹은 후험적 참(a posteriori truth)인 언명이다. 그 말은, 위 명제의 참, 거짓여부가 경험적으로 규명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경험이 갖는 정합성을 토대로 위 명제가 거짓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위 명제를 당위화하면 어떤가?

(Y2)프랑스의 수도는 베를린이어야 한다.


프랑스의 현 수도는 분명 베를린이 아니다. 그러나 위 명제가 당위화 되는 순간부터 명제 Y1에서 분명했던 진릿값은 명제 Y2에서 모호해진다. 그 이유는, 프랑스의 수도가 베를린이어야 하는 이유가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프랑스의 수도가 베를린이면 안 되는 이유역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가 슐리펜 작전(Schlieffen Plan)이 성공해서 프랑스 국토 전부가 잠정적으로 독일의 영토가 되었다고 가정할 때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Y2)를 주장할 수 있으며, 반면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문제를 근거삼아 (~Y2)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을 수 있고, 굳이 이러한 예시를 들지 않는다 해도 좌우지간 (Y2)와 (~Y2)가 동시에 제기될 수 있는 종류의 명제이며 양자모두 논리적 가능성을 갖는 동시에 당위의 성향상 양자 모두 연역될 수 있다면 우리는 위에서 다뤘던 공리화된 가치명제의 딜레마와 동일한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에서 윤리학의 명제와 미학의 명제가 말할 수 없는 것에 속하며 초월적인 것이라고 했듯이 위와 같은 당위 명제는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라 할 수 없게 돼 버리는 것이다.(6.421)

.
우리는 위 논의를 통해 가치명제와 종합적 명제의 공리화를 통한 진릿값 규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분석적 명제(Analytic proposition)의 공리화를 통한 진릿값 규명이 가능한지에 대해 논의해보자. 다음의 명제를 보자.

(G1)파랑색 자동차라면 색깔이 칠해져있는 자동차이다.

위 명제 (G1)은 분석적 참(Analytic truth)이자 선험적 참(a priori truth)으로서 명제의 진릿값이 명제의 내용만으로 파악될 수 있는 사실명제이다. 흥미로운 것은 명제 (G1)을 당위화 할 때 나타난다.

(G2)파랑색 자동차라면 색깔이 칠해져있는 자동차여야 한다.

명제 (G2)를 자세히 본다면 우리는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자동차가 파랑색이라면 그 자동차는 필연적으로 색깔이 칠해져 있는 자동차여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파랑색이면서 색깔이 없는 자동차가 논리적으로 존재불가능하다는 점에서 (G2)가 논리적으로 참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는 모순율의 법칙을 역으로 이용해서 필연적 참인 분석적 명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 당위명제가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가장 처음 다뤘던 명제 (K1)과 (K2)의 딜레마의 해답을 제시하는 결과이다. 왜냐하면 1)Z에게 (K1)과 (~K1)의 선택지가 있고, 2)Z가 (~K1)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3)Z는 내가 논증 (*k1d)의 S1-S2-T1-P3-S3에서 명증했듯이 배중률의 원리에 따라 반드시 (K1)을 선택해야 하고 따라서 4)당위명제 (K1)과 (K2)에 대해 메타적인 당위명제 <Z가 (~K1)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Z는 (K1)을 선택해야 한다>는 언명은 정책명제임에도 불구하고 제 3자 배척의 원리에 의해 참이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가치명제의 공리화를 통한 당위 명제적 차원의 진술과 종합적 명제의 공리화를 통한 당위 명제적 차원의 언명이 진릿값을 갖는 것은 불가능한 반면, 필연적으로 참인 분석적 명제를 당위로 변환시킴으로서 분석명제의 전건언명과 후건언명이 갖는 필연적인 상관관계를 당위명제에 적용시키고 배중률과 모순율의 원리를 역이용해서 진릿값을 갖는 당위명제가 (i) 분석명제의 공리화를 통해 도출가능하며, (ii)사실명제에 기반을 두는 당위명제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성공적으로 밝혔다. 결과적으로 내가 (나)에서 주장했던 핵심적인 논거는 반증되었으며, 정책명제는 원리적으로 진릿값을 가질 수 있다는 점과 (ii)의 결론에 따라 당위명제의 범주를ㅡ도덕철학적 명제들이 갖는 고질적인 딜레마를 피하기 위해ㅡ기존의 도덕철학적 명제에서 종합적 명제와 분석적 명제로까지 확장함으로서 모든 당위명제가 공리화 된 가치명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다. 물론, 당위명제가 진릿값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은 분석적 명제에 대한 논리 실증주의적 비판, 즉 그것은 자연에 대한 테제가 아닌 언어에 관한 테제라는 지적에서 벗어나기 힘들 수 있으나, 그것은 당위명제가 진릿값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현 논의와는 무관한 문제라 할 수 있겠다. 당위명제가 진릿값을 가질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문제는 당위명제가 속성적으로 세상에 대한 어떠한 것을 말해줄 수 있는가하는 문제와 근본적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석적 명제에 기반을 두는 당위명제 역시 명제들에 대한 진릿값이 아닌 명제들의 존재에 대한 진릿값만이 존재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당위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당위명제가 아무런 논리적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는 비트겐슈타인과 카르납의 주장을 피하기 위해 도덕철학적 차원의 당위명제가 아닌 분석 명제적 차원의 당위명제에 기대기만 할 수는 없을 듯이 보인다. 아마 이에 대해서는, 종합적 명제의 공리화와 분석적 명제의 공리화가 둘 다 가능하며 분석적 명제를 통해 확보된 진릿값으로 당위명제의 진릿값을 연역할 수 있다고 상정할 때 가치명제와 종합적 사실명제를 메타-분석적 명제로 환원시킴으로서 진릿값을 가질 수 없는 기존의 가치명제들의 필연적인 상관관계를 밝히고 진릿값 규명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당위명제의 진릿값 규명가능성과는 다른, 또 다른 작업을 요구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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