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철학 교수 L씨는 며칠 전 흄의 연역과 귀납 구분 및 정당화된 지식에 대한 인식론 관련 강의를 했다.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추론될 수 있는 인과는 논리적인 연역보다는 개연적인 귀납을 통해서만 근거지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귀납적 결론의 엄밀한 정당화는 귀납의 성향상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인과법칙은 그것이 후험적 지식에 의존해야하는 만큼 우리가 인과율의 법칙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그러나 나는 강의 내용보다는 강의 도중 L씨가 제시한 연역과 선험적 지식에 대한 예시에 의문이 생겼다. 그는 (P1)<모든 삼각형 내각의 합은 언제나 180도이다>라거나 (P2)<총각인 처녀는 존재할 수 없다>는 명제가 모순율의 법칙에 따라 선험적 참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러한가?
2.나는 예전부터 모순율의 법칙이 암묵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숨은 전제(hidden premise)에 관심이 많았다. 이를테면 개념상의 모순을 논리적 실현 불가능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언술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는 참인가? 이 명제가 언표하고 있는 내용은 그러니까 사실과 정합적이거나 사실을 온당히 반영하는가? 언명 (P1)과 언명 (P2)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전자부터 생각해보자. 구체 위의 도형을 다루는 리만기하학에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 이상일 수 있으므로 삼각형의 집합에 포함되는 원소들은 <내각의 합이 180도 이어야한다>는 필요조건을 가지지 않는다. 강의 도중 내가 이 반례를 지적하자 L씨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삼각형의 범주를 유클리드 평면 위의 삼각형으로 한정하자는 발언을 했다.
그런데 삼각형의 범주를 유클리드 평면 위의 삼각형으로만 한정해야 하는 이유가 불분명해 보인다. 리만 삼각형 역시 세 개의 변과 세 개의 각을 갖는다는 점에서─그 도형은 비록 내각의 합이 세 직각의 합과 동치가 될 수 있지만─엄연히 삼각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수의 반론은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 편의상 유클리드 평면 위의 삼각형만 삼각형으로 취급하거나, (2) 리만삼각형은 사실 삼각형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만약 180도의 내각의 합이 삼각형의 필요충분조건이라면 <리만삼각형의 삼각형임>과 <유클리드삼각형의 삼각형임>은 상호 모순되는 <삼각형의 정의>에 기초를 두고 있으므로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속성을 갖는 도형일 것이다. 그러나 삼각형의 기하학적 필요충분조건에 세 개의 각과 세 개의 변역시 포함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2)는 분명 옳지 않은 주장이다. 반대로, 만약 L씨가 (1)을 의미한 것이라면 그것은 삼각형의 전체집합에서 일부의 삼각형(즉 모든 유클리드 평면 위의 삼각형)만을 언급한 것이므로 언술 (P1)에서 사용된 <모든>이라는 보편-관형사는 <어떤>이라는 존재-관형사로 교체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L씨가 주장하고자 하는 모순율은 삼각형 그 자체에 내재해있는 어떤 속성 p, 그리고 그와 양립할 수 없는 ~p라는 독립적인 속성 사이에서 빚어지는 개념적인 모순율보다는 유클리드 평면 위의 삼각형이 갖는 기하학적 한계에서 비롯되는 차원-종속적 모순율에 가깝다. 즉, <내각의 합이 x(단, x>180)도인 삼각형은 존재할 수 없다>는 언명은 2차원이라는 닫힌계 내에서만 참인 언명이므로 선험적 참도 아니며, 그러한 삼각형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도 않으므로 L씨의 예시는 잘못인 것 같다.
3.마찬가지로 총각인 동시에 처녀인 사람이라는 개념 역시 모순되지는 않는 것 같다.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성기를 동시에 갖고 있는 와중에 성관계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은 논리적으로 존재 가능하므로 총각인 동시에 처녀인 사람은 충분히 존재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혹자는 <총각이자 처녀인 대상>이라는 개념이 상호 모순적인 동시에 공집합 명사(empty term)라는 지적을 하며 내가 한 것은 총각과 처녀의 정의에 빗나가는, 양성인─총각이자 처녀이지만 동시에 총각도, 처녀도 아닌─상황 상정을 통한 모순율 해소일뿐이라는 지적을 할 수는 있겠다. 고로 만약 이 시도가 적절치 않다면 <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결혼하지 않은 여자>의 근본적인 모순 발생지점인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규명한 다음 양자가 동치인 상황이 논리적으로 존재가능하다는 바를 밝히면 될 것이다. 그런데 막상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성기의 종류 외에 무엇인지 애매해 보인다. 성정체성을 결정짓는 것이 성격이라면 남성 같은 성격─물론 남성 같은~이라는 형용사역시 이미 남성 같은 성격이 무슨 성격인지를 전제하고 있긴 하지만 편의상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거친 의미를 사용한다면─을 지닌 여성은 애초에 남성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므로 <남성 같은 성격을 가진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결혼하지 않은 남성>과 동치라는 괴이한 결론이 나오게 되므로 불합리하다. 마찬가지로 성정체성은 성기의 종류로도 판별하기 힘들어 보인다. 트렌스젠더 수술을 통해서라면 여성이 남성의 성기를, 남성이 여성의 성기를 갖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 보자면 총각인 동시에 처녀인 사람이 논리적으로 존재불가능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성기의 종류에 관한 논점을 제시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뇌과학적인 연구결과 역시 두뇌와 성별의 무관성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추세고 보통 남성과 여성의 유일한 차이라고 지적되곤하는 성호르몬의 비율과 성염색체 차이마저도 성염색체 이상이 있는 사람의 성호르몬 조작이 가능하다는 사례를 통해 애매한 바운더리의 문제를 이끌어낼 수 있는 사안이므로 우리는 남성과 여성을 구분 짓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찾을 수 없다는 난관에 빠지게 된다. 가령, XX는 여자고 XY는 남자다. 그렇다면 XXY나 XXXY는 무엇이고 X나 XYY는 무엇인가? 클라인펠터 증후군이나 터너 증후군의 사례에서 우리는 성염색체를 통해서조차 남성과 여성을 구분짓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전자는 생물학적 남성에게서 발견되고 후자는 생물학적 여성에게만 한정되는 질환이다. 허나 그렇다 해도 우리는 남성의 특징을 하나씩 여성의 특징으로 교체해보는 사고실험을 설계함으로서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불가능에 가까운 지점을 찾을 수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마찬가지로 <결혼하지 않은 총각인 동시에 결혼하지 않은 처녀인 사람이 있을수 있다>는 언술이 모순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총각과 처녀에 구체적으로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지 규명불가능하다면 우리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양자가 동치인 상황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확언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총각이 p라면 처녀는 ~p여야만 언술 (P2)는 참이 되는데 처음부터 처녀가 총각이 아니어야만 한다는 논리적 필연성을 근거 짓기 위한 일차적 조건인 처녀와 총각의 차이가 불분명하다면 어떤 처녀는 총각이거나 총각이 아닐 수 있으므로 언술 (P2)의 진리치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적 태도를 견지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4.선험적 참에 대하여 사람들이 보통 드는 예시는 1+1=2라는 수리적 명제의 엄밀성이다. 1+1=2라는 명제가 선험적으로 참이라는 것은 그것이 분석적, 개념적으로 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1>이라는 기호는 다른 가능세계에서 <3>을 의미할 수 있으므로 나머지의 수리적 방법론과 기호체계가 동일하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3+3=2가 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지만 우리가 <1>이라는 기호로 표현하는 그 무엇은 그것이 <◎>라는 기호로 표기되어도 <9>라는 기호로 표기되어도 여전히 <1>이라는 개념적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1+1=1이라는 수리적 명제는 선험적으로 모순되는가? 기호는 합의에 의한 것이므로, 위 수리적 등가가 모순된다면 그것은 기호적 구성에서 비롯되는 형식적 모순보다는 각 기호가 내포하는 수치들의 관계가 갖는 어떤 개념적 비정합성에서 비롯되는 모순일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1+1=2라는 수리적 명제는 논리적으로 1+1≠2일 수 없는가? 이 물음에 긍정한다는 것은 이 명제가 모순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 물음에 부정한다는 것은 위 명제가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에디슨처럼 하나의 찰흙에 또 다른 찰흙을 더하면 하나의 찰흙이 된다거나 하나의 연필을 둘로 나눈 후 양 끝을 깎는다면 연필 두 개가 생기므로 1+1=1이라거나 1/2=2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고 찰흙의 예시에서 부피가 문제라면 압력을 증폭시켜 기존의 찰흙과 동일한 크기로 만듦으로써 동일한 부피를 유지한 상태로 1+1=1의 건전성을 주장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 예시는 처음부터 <물체의 개수>나 <물체의 부피>라는 변수만 고려하고 있을 뿐 물체의 질량은 고려하지 않고 있으므로 옳지 않은 결론이다. 마찬가지로 혹자는 〚x+y〛=2라는 최대정수함수를 제시하며 x=1.5이며 y=0.8일 때도 이 수식은 성립한다는 주장을 할 수 있고 이는 실제로 수리적으로도 참이지만 이 결론은 최대정수함수의 규칙적인 수리적 성질에 따른 결론이므로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1=1이라는 수식이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등식이 수학적 합의에 의해 규정된 덧셈이라는 기초적인 수리적 규범에 위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수리적 규칙이 위 수식의 모순여부를 결정짓는 주요변수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수리적 규칙은 합의이므로 선험적 참이 아닐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그러나 수리적 규칙은 단순한 합의보다 좀 더 고차원적인, 어떤 증명이나 최소한 어떤 공리에 의거한 규칙이 아니었던가?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한 바가 옳다면 수학적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동어반복이라 볼 수 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수리적 규칙이란 단지 서로 동일하거나 동일하지 않은 두 값의 동일성을 좀 더 쉽게 규명하거나 부정하게끔 도와주는 일종의 도구로 환원된다. 즉 우리는 모순율의 법칙을 굳건히 떠받들고 있는 <φ와 ~φ의 양립불가능성>이라는 최종적인 기준점에 도달할 수 있다. 1+1=1이라는 수식이 모순인 이유는 이것이 2=1을 의미하며, 2라는 기호가 지시하는 2라는 추상적 개념과 1이라는 기호가 지시하는 1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서로 여집합적 관계를 갖고 있다고 할 때 위 수식은 φ=~φ로 변형될 수 있는데 이때 φ는 모순율의 법칙에 따라 ~φ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1의 값이 2가 아닐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은 없는가? 데카르트의 악마논증을 응용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은 것 같다. 1+1=2라는 수식은 사실 거짓이지만 전지전능한 악마에 의해 참인 것처럼─즉 동어반복인 것처럼─보이게끔 유도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5.흄에 의하면 <관념 간의 관계로서의 지식>이란 직관적으로든 논증적으로든 완전하게 정당화될 수 있는 연역적 지식이며 <사실관계로서의 지식>이란 특정한 명제가 주어졌을 때 그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갖는 명제, 그러니까 개연성을 갖되 결코 완전히 정당화될 수 없는 귀납적 지식을 의미한다. 그런데 논증적으로 완전히 정당화될 수 있는 연역적 지식이라는 것은 존재 가능한가? 1+1=2라는 수리적 명제는 하나의 연역적 지식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1+1=2가 거짓인 상황을 어떤 방식으로건 상상할 수 있으며 이때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고 위 수식이 거짓인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면 그것은 1+1≠2인 상황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 수식은 흄이 말한 <사실관계로서의 지식>에 포함될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수리적 명제는 연역적, 선험적 명제가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요컨대 여느 모순되는 명제가 그렇듯이 1+1=1의 모순됨은 매우 많은 추가적인 전제를 상정해야만 도출가능하다. 우리 모두의 감각소여가 라플라스의 악마에 의해 왜곡되었다면 위 수식은 기실 모순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모순으로 보일 수 있으며 따라서 ◊(1+1≠2)라는 논리적 가능성이 발굴되기 때문이다. 수리적 규칙이 합의 이상이라는 점을 밝히고자 한 논리주의적 실재론과 형식주의적 집합론과 직관주의적 구성이론이 전부 불완전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위 가능성의 의의는 더더욱 커진다.
그런데 위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어떠한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내용을 언표 하는 것으로 보이는 명제>에 대해서도 그것이 필연적인 모순을 내재하고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므로 우리는 결국 그 어떠한 모순도 규명할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철학에서 말하는 논리적 가능성이란 <법칙적/원리적으로 상상될 수 있는 것>에 적용되는 개념인데 만약 <법칙적 상상가능성의 바운더리>,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상상가능한 내용의 한계>마저 전지전능한 악마에 의해 설정되었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전지전능한 라플라스의 악마에 속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바로 그 법칙적으로 상상가능한 상황에 의해 우리는 논리적 불가능성이 법칙적으로 논리적 불가능성이 아닐 수 있다는 일견 소피스틱한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라플라스의 악마 논증을 재도입하자면 우리는 (임의의 명제 φ에 대해) φ와 ~φ의 양립불가능성으로 정의되는 모순율의 법칙 역시 논리적으로 회의할 수 있을 법하다. 즉,
(P1) □φ↔﹁◊﹁φ
(P1') ◊φ↔﹁□﹁φ
라 해도,
(P2) ψ→◊(φ=﹁φ)
이라면,
(Q1) ◊(φ=﹁φ)→﹁□﹁(φ=﹁φ)
(Q2) □﹁(φ=﹁φ)→◊﹁(φ≠﹁φ)
(Q3) ψ→◊﹁(φ≠﹁φ)
도 성립할 수 있다. 양상 논리적으로 논리학의 근본 전제의 오류가능성을 연역하(는 듯이 보이)는 이 논증은 전제 (P2)만 참이라면 성공적으로 모순율의 법칙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전제 (P2)의 전건언명 ψ, 그러니까 상상 가능한 범주에 한계를 그어놓은 전지전능한 악마를 상상하는 것은 법칙적으로 가능한가? 분명 우리는 φ와 ~φ가 양립 가능한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가 경험 초월적 존재자의 외부 개입에 의해 상상 가능한 범주에 한계가 그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상상>은 해볼 수 있다. 혹자는 여기서 모순율의 법칙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비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L) ﹁◊(φ=﹁φ)이므로, 실제로는 ◊(φ=﹁φ)인데 ﹁◊(φ=﹁φ)를 믿지 않을 수 없게끔 우리가 상상 가능한 범주에 한계를 그어둔 라플라스의 악마는 법칙적으로 상상불가능하다.
6.그런데 이렇게 제시된 논증 (L)은 몇 가지의 문제점을 안고 있는 듯이 보인다. 우선적으로 이 논증의 전건언명이 실제로 후건언명을 함축하는지 불분명하다. ﹁◊(φ=﹁φ)라는 언명이 참이라 해도 ◊(possibly)라는 양상논증 지시어가 함축하는 가능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처음부터 모든 종류의 가능성을 <상상가능성>이라는 논리적 가능성의 범주 내로 한정 짓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논리적 가능성의 범주 외의 메타논리적인 명제의 진위를 논리적으로 판단하거나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논증은 처음부터 ﹁◊(φ=﹁φ)라는 논리적 가정을 통해 ﹁◊(ψ→◊(φ=﹁φ))라는 메타적인 결론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논점선취의 오류이며 타르스키의 메타언어와 대상언어 원리에 위배되므로 온당치 않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모순율의 법칙은 참이다>는 명제를 회의하고 있으므로 모순율의 법칙을 참으로 간주하고 전개되는 방식의 비판은 여기서 용납되지 않는다. φ와 ~φ가 모순되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φ가 지닌 어떠어떠한 속성들>이 <~φ가 지닌 어떠어떠한 속성들>과 양립불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양립 불가한 것으로 판단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그것이 양립 가능한 상황을 상상불가능하기 때문이라면, 그리고 그 상상의 주체가 상상 가능한 범주에 한계가 있을 수 있는 인간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양립 가능한 상황을 상상할 수 없으므로 전능한 경험 초월적 존재자 역시 그것이 양립 가능한 상황을 상상할 수 없다>는 언명이 필연적으로 참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경험-초월적 존재자가 논리에 메타적인 존재자가 아니어야만 하는 아무런 논리적 이유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우리로서는 어떠어떠한 것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뿐이므로 위 명제는 <우리는 모순율의 법칙을 참이라 믿고 있다>는 (의미론적으로 훨씬 더 정확한) 명제로 교체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데카르트와 흄이 보여주듯 믿음은 언제나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점과 <우리는 x를 참이라 믿는다>는 언술의 건전성이 x가 실제로 참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종합해서, 우리는─프레게의 판단기호 ⊢(나는 ~을 참이라 생각한다)를 사용해─다음과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다:
(*L) ⊢(﹁◊(φ=﹁φ))이고, ﹁□(⊢x→□x)이므로, 실제로는 ◊(φ=﹁φ)인데 ﹁◊(φ=﹁φ)를 믿지 않을 수 없게끔 우리가 상상 가능한 범주에 한계를 그어둔 라플라스의 악마는 법칙적으로 상상가능하다.
논증 (*L)은 ﹁◊(φ=﹁φ)에 대한 믿음의 오류가능성(fallibility)을 토대로 ◊(φ=﹁φ)가 성립될 수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물론, 혹자는 믿음의 오류가능성을 토대로 오히려:
(*L1) ﹁□(⊢x→□x)이고 ⊢<⊢(﹁◊(φ=﹁φ))이고, ﹁□(⊢x→□x)이므로, 실제로는 ◊(φ=﹁φ)인데 ﹁◊(φ=﹁φ)를 믿지 않을 수 없게끔 우리가 상상 가능한 범주에 한계를 그어둔 라플라스의 악마는 법칙적으로 상상가능하다>가 참이므로, 우리가 상상가능한 범주에 한계를 그어둔 라플라스의 악마는 법칙적으로 상상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는 비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편의상 이 주장을 단순화하자면 다음과 같다:
(*L2) ﹁□(⊢x→□x)이고 ⊢(*L)이므로, 우리가 상상 가능한 범주에 한계를 그어둔 라플라스의 악마는 법칙적으로 상상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L2‘) ﹁□(⊢x→□x)이고 ⊢(*L)이므로, ﹁□(⊢(*L)→□(*L))이다.
로 좀 더 간략하게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입장에 대한 이 비판은 두 가지의 중대한 맹점을 갖고 있는 듯이 보인다. 우선적으로 명제 (*L2’)은:
(*L2e) ﹁□(⊢(*L)→□(*L))이므로, ⊢(*L)이라면, □((*L)⊕﹁(*L))이다.
는 명제를 함축한다. 한 쪽에 대한 가능성이 있다면 다른 쪽에 대한 가능성 역시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적 (*L2)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설령 위 지적이 온당하다 해도 상상가능하다는 것의 상상가능성을 따지는 것은 앞서 지적한 타르스키의 의미론적 층위구분의 원리에 위배된다. 상상가능성이 이미 가능성의 영역을 다루고 있는 이상 그것에 대한 이차적인 가능성을 묻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위 언명 (*L2)의 가장 큰 난점은 위 비판에 사용된 논거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L2c) ﹁□(⊢x→□x)이고 ⊢(*L2)이므로, ﹁□(⊢(*L2)→□(*L2))이다.
는 카운터 비판 역시 가능해 보인다. 때문에 비판 (*L2)는 무한퇴행으로 연결되며, 나의 입장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이로써 나는 나의 주장이 옳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무의미하다는 바를 규명했으므로 (1) 내가 <명제 (*L)은 참이다>고 주장한다 해서, (2) 그리고 언명 (*L)이 참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해서 (*L)에 대한 나의 주장이 부정되거나 반증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왜냐하면 언명 (*L)이 참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거나 거짓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 가능한 범주에 한계를 그어둔 라플라스의 악마를 상상 불가능할 가능성이 있거나 상상 가능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라플라스의 악마는 단지 상상불가능하거나 상상가능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므로 이러한 라플라스의 악마를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한 논리적인 이유가 제시되지 않는 한 언술 (*L)을 부정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7.물론 혹자는 여전히 이에 대해 <우리가 상상 불가능한 것이라면 아무리 전지전능한 라플라스의 악마라 해도 우리에게 상상 불가능한 것이 그에게 가능하다고 가정할 수 없을 것이다>는 비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불가능한 것이라면 <라플라스의 악마가 그러한 것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가정을 하는 것>은 불가한가? 어째서 그러한가? 이 주장은 아마 우리가 상상불가능한 것이라면 라플라스의 악마가 그러한 것을 상상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는 불가지론적 함축에 기반을 두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는 나에게 잘못으로 보인다. 우리가 상상불가능한 것을 상상할 수 있건 없건 악마가 그러한 것을 상상할 수 없어야만 하는, 그러니까 악마가 그러한 것을 상상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해야만하다거나 악마 역시 인간과 동일한 상상가능성의 범주를 가져야만 하는 이유가 없다면 그것은 여전히 논리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설혹 <우리가 상상불가능한 것을 라플라스의 악마가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가정을 할 수 없다>는 위 지적, 즉 <우리가 상상불가능한 것을 라플라스의 악마가 상상가능할지는 모르는 일이다>는 지적이 온당하다 해도 이 주장은 <라플라스의 악마가 우리의 상상가능한 범주에 제한을 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불가능한 것을 상상불가능하다는 해명에 논리적 가능성은 없다>는 바를 함의(entail)하지는 않는 것 같다. (D1)<라플라스의 악마라 해도 우리가 상상불가능한 어떤 것을 상상하거나 실현시킬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는 주장이 참이라 해도, (D2)<라플라스의 악마라면 우리가 상상가능한 범주에 제한을 두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주장은─라플라스의 악마가 우리가 상상가능한 범주에 제한을 두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해야만 하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므로─(D1)이 수용돼도 여전히 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언명 (D1)과 언명 (D2)가 양립가능하다면 나의 주장에 대한 전자의 비판은 근본적으로 나의 입장과는 무관한(tangential) 지적이라 볼 수 있다.
혹자는 물론 논리적 상상가능성을 통해 논리적 법칙─예컨대 모순율 같은 법칙─이 참이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을 연역하는 과정 자체가 논리법칙을 전제하고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지만 나는 처음부터 <우리가 보기에 이 논리법칙은 문제가 없다>는 주장에 긍정하고 있으며 단지 <이 논리법칙은 선험적인 참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을 뿐이므로 문제될 것은 없는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배중률의 법칙이 기실은 참이 아닐 수 있으므로 논리적 상상가능성을 통해 인간의 상상가능성의 범주에 한계를 그어놓은 라플라스의 악마를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거나 가능하지 않아야만 한다는 이분은 불가하다>는 비판은 이미 배중률의 법칙이 특정 가능세계에서 성립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긍정하고 있으므로─다시 말해서 배중률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을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언명을 전제하고 있으므로─오히려 나의 논증을 지지하는 비판 아닌 비판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8.만약 여기까지의 논의가 합당하다면 선험적 명제나 분석적 명제 등등 형식적 필연성의 객관성이나 선험성 혹은 초월성에 관해 우리는 침묵해야만 한다. 모순율의 법칙이나 배중률의 법칙이나 동일률의 법칙 같은 삼대 논리법칙이 깨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단지 탈논리주의적 관점에서 논리법칙에 위배되는 경우를 상상할 수 없게끔 어떤 원리적인 한계점이 상정돼 있기 때문이라면 논리적 필연성이란 단지 인간의 상상가능성의 범주 내로 한정된 불완전한 사고의 결과물일 수 있으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특정 명제들이 상호적으로 갖는 논리적 성질이나 특성에 관해 <특정 명제들이 갖는 논리적 필연성은 적어도 나에게는 참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 명제들이 실제로 선험적인 논리적 필연성을 갖는지는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인 주장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논리적 필연성은 약속에 근거한 논점선취적 동어반복이나 합의를 통해 공리화된 규범적 결과물로 환원되며 논리주의적 실재론은 불가지론으로 격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