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만일 내가 인지주의적 도덕 실재론자라면 나는 도덕적 객관주의에 동의할 것이고, 만일 내가 인지주의적 도덕 실재론자가 아니라면 나는 비인지주의적 정의주의에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내가 비인지주의적 정의주의에 동의한다면 나는 문화적 상대주의에 동의해야할 것이다. 따라서 만일 내가 도덕적 객관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나는 문화적 상대주의에 동의해야 할 것이다.
(P)는 타당한 논증인가? 위 논증을 기호화해보면 다음과 같다:
(C⊃O)∧(~C⊃E), E⊃R ∴~O⊃R
이 논증의 타당성에 긍정하기 위해선 각 전제가 결론을 진리함수적으로(truth-functionally) 함축하는지를 보여야한다. 편의상 약식진리표를 이용해 귀류법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자연연역체계를 사용해보면 이는 다음과 같이 증명될 수 있다.
1.(C⊃O)∧(~C⊃E) P
2.E⊃R P
3.~O AP
4.C⊃O 1 Simp.
5.~C 3, 4 MT
6.~C⊃E 1 Simp.
7.E 5, 6 MP
8.R 2, 7 MP
9.~O⊃R 3~8 RCP
따라서 (P)는 형식적으로 타당함을 알 수 있다. 조건적 증명 규칙을 사용해 전제 1과 2, 그리고 가정된 전제 3에서 ~O⊃R을 연역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1, 2와 3의 연언을 x, 결론 9를 y라고 가정하면 x⊢y 다. 그렇다면 다음의 논증은 어떠한가?
(Q) 만약 셀라스가 과학주의적 도덕론자라면, 누군가가 그를 논박하지 않는 한, 그는 존재론적 자연주의를 옹호할 것이다. 만일 그가 경험초월적 엔터티의 존재가능성에 긍정한다면 그는 존재론적 자연주의를 옹호한다고 말할 순 없다. 그러나 만일 셀라스가 경험초월적 엔터티의 존재가능성에 긍정한다면 그는 그때도 여전히 과학주의적 도덕론자일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셀라스가 과학주의적 도덕론자라면 아무도 그를 논박하지 않을 것이다.
이 논증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만약 셀라스가 과학주의적 도덕론자라면, 누군가가 그를 논박하지 않는 한, 그는 존재론적 자연주의를 옹호할 것이다>는 언술은 S⊃(R∨O)로 기호화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세 번째 문장은 T⊃S로, 마지막 문장(결론)은 S⊃R로 기호화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번째 문장에서 나타난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Q1) 셀라스가 경험초월적 엔터티의 존재가능성을 긍정한다면 <그는 존재론적 자연주의를 옹호한다>고 말할 순 없다.
(Q2) <셀라스가 경험초월적 엔터티의 존재가능성을 긍정한다면 그는 존재론적 자연주의를 옹호한다>고 말할 순 없다.
<셀라스는 경험초월적 엔터티의 존재가능성에 긍정한다>는 언술을 T로 치환하고 <그는 존재론적 자연주의를 옹호한다>는 단순명제를 O로 치환하면, 우리는 (Q1)과 (Q2)가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Q1') T⊃~O
(Q2') ~(T⊃O)
여기서 볼 수 있듯이 (Q1)의 해석을 채택한다면 부정되는 것은 후건이지만 (Q2)의 해석을 채택한다면 명제 T⊃O 자체가 부정된다. 즉, 논증 (Q)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방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Q1')
1.S⊃(R∨O)
2.T⊃~O
3.T⊃S
4.S⊃R
(*Q2')
1.S⊃(R∨O)
2.~(T⊃O)
3.T⊃S
4.S⊃R
그렇다면 이중 어느 해석이 (Q)에 대한 합당한 기호화인가? 어느 한 쪽이 그르다고 보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러한 의미론적 다중성은 <~고 말할 순 없다>는 명제결합사의 범위불분명성에서 빚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카니는 (*Q2')이 논증 (Q)에 대한 올바른 기호화라고 생각한다. 만약 (Q1')의 해석이 합당하다면 논증 (Q)의 두 번째 언술은 (E1)<만일 셀라스가 경험초월적 엔터티의 존재가능성에 긍정한다면 그는 존재론적 자연주의를 옹호한다고 말할 순 없다>같은 애매한 표현이 아니라 (E2)<만일 셀라스가 경험초월적 엔터티의 존재가능성에 긍정한다면 그는 존재론적 자연주의를 옹호하지 않을 것이다>와 같은 분명한 부정법이 사용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분명한 부정법>이 아니더라도 언명 (E1)을 언명 (Q1')으로 이해하는 데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 (Q1')을 (E2)에 대한 기호화로 파악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해서 언명 (E1)을 (Q1')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뚜렷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논증 (*Q1')과 (*Q2')은 타당한가? 다시 말해서 전제 2번의 변화가 논증 (Q)의 타당성에 어떤 유의미한 영향을 준다고 볼 수 있는가? 귀류법을 이용해 검증해보자.
여기서 볼 수 있듯 우리는 논증 (*Q1')과 (*Q2')의 부당성을 보이는 데에 실패했다. 논증 (*Q1')과 (*Q2')이 부당하다는 가정 하에 진리치를 채워나가던 도중 모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즉 나는 막 (*Q1')과 (*Q2')이 타당한 논증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셈이다. 그러므로 전제 2번에 (Q1')을 대입하건 (Q2')을 대입하건 논증 자체의 정당성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언명 (E1)에 대한 해석을 굳이 (Q1)과 (Q2)로 구분할 필요가 있는가? 만약 양자가 양립가능하다면 앞서 살펴본 구문론적 애매성의 문제는 해소되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Q1')⊕(*Q2') 인가, 아니라면 (*Q1')∨(*Q2')인가? 여기까지의 논의가 합당하다면 정답은 후자로 보인다. 각 전제 1과 3의 연언을 (c)라는 복합명제로, 결론을 φ로 표현한다면:
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허나 (Q1')≡(Q2')은 참이 아니다. 다음의 진리표를 통해 볼 수 있듯 양자의 동치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경우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E1)에 대한 각 해석들은 동치가 아니므로 (Q1)과 (Q2) 사이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구문론적 애매성은 소거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명제논리의 한계를 발견한다. (E1)을 (Q1)과 (Q2)로 구분지을 수 있는 이유는 (E1)이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언술이기 때문이다. 명제논리적 기호화에 있어서 이러한 중의성은 온전히 고려되지 않으며, 설혹 고려된다 해도 (Q1)과 (Q2)는 각각 상이한 명제로 취급될 뿐이다. 카니는 물론 이러한 문제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E1)을 (Q2)로 기호화하고 있을 뿐이다. 적어도 논증 (Q)의 증명에 있어서 (E1)의 중의성은 문제시될 이유가 없다. 앞서 살펴보았듯 (*Q1')이나 (*Q2')이나 결론의 증명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허나 우리는 (E1)과 마찬가지의 형식을 갖는 언술을 전제로 하는 임의의 논증 Γ를 상정해볼 수 있고 더 나아가 Γ의 증명가능성(provability)이 오롯이 (E1)에 대한 올바른 문맥상의 해석에 달려있는 경우를 논리적으로 가정해볼 수 있다. 즉 우리는 (Q1')을 전제로 갖는 논증 Γₐ와 (Q2')을 전제로 갖는 논증 Γᵦ에 대해, Γₐ ⊢φ지만 Γᵦ ⊢~φ인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E1)의 중의성, 그러니까 (Q1)과 (Q2)의 사이에 놓여있는 구문론적 애매성의 소거는 고차 논리를 사용하거나 기호화의 대상이 되는 논증의 문맥적 불분명성을 제거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